<너는 나처럼 살지 마>
나는 생각 중독이다.
미국의 행동심리학자는 책 <Overthinking>에서 생각 중독을 이렇게 정의한다.
“생각 많은 사람은 메타사고를 한다. 자기 생각을 또다시 분석하며 그 생각의 생각에 빠진다.”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려고 하면 머릿속에 인터넷 창처럼 수많은 탭이 우르르 떠오르고, 방금 전 했던 대화를 거듭 재생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검열하고 복기해 보며,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등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 심한 결정 장애를 겪고,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책하고 걱정하고 신경을 쓰는 증상. 이것이 바로 나의 상태다.
서울에서 열리는 ‘멍 때리기 대회’를 본 적이 있다. 취지는 여유 없이 시간에 쫓기고 일에 치이는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을 권고하는 것이라는데, 오히려 '아무 생각'을 '아무 생각'없이 곱씹는 내가 참여한다면 아마 아주 쉽게 우승을 할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서 생각에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는 느낌을 아는가.
누가 나에게 “그만 좀 생각해”라고 말해도, 난 멈출 수가 없다. 이건 마약 중독보다 무섭고 술과 담배만큼 백해무익하다. 아, 이런 ‘생각 많은’ 기질을 토대로 책 한 권을 썼으니 무익은 아닌가.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자꾸만 차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불안하고 피곤한 건 무익한 게 틀림없다.
잠자기 전, 라라가 늘 그렇듯 오늘 하루동안 있었던 걱정을 털어놓았다.
요즘 라라에게 10월 말에 있는 운동회가 이슈다. 타 학교에 비해 1/2 이상 작은 운동장을 가진 라라네 학교는 전교생의 원활한 체육 활동을 위해 학교 운동장이 아닌 동네 체육관을 빌러 단체 운동회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요즘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운동회 한다고 총을 쏘거나 단체 응원을 하면 입주민들이 그렇게 항의를 한다니, 그걸 고려했을 수도 있고.
“내일 체육 시간에 달리기 한대. 넘어지면 어떡해?”
또또. 하지만 나는 엄마답게 웃으며 대답한다.
“괜찮아. 꼴찌 해도 재밌게 달리면 되지.”
늘 그렇듯 나의 위로는 소용이 없다.
“애들이 놀리면 어떡해. 나 속상할 것 같아.”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는 친구에게 건넨 인사 한마디를 복기하며 걱정했던 라라다.
“엄마, 내가 오늘 윤아한테 ‘안녕’ 했는데, 윤아가 그냥 갔어. 나한테 화났나?”
“윤아가 못 봤을 수도 있지. 못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야. 어제도 그랬어.”
예전 같았으면 손에 들고 있던 밥숟가락을 거칠게 탁 내려놓으며 한 마디 했을 거다. 그만 좀 할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지금은 이곳에 <너는 나처럼 살지 마>를 쓰면서 하려던 말을 두세 번 삼킨다.
라라는 늘 남의 표정을 살피며, 내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생각하는 '패턴'을 갖고 있다.
이 특징은 '예민하다'는 기질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간다. 예민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세상을 세밀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모래 한 알의 무게, 친구의 말투의 온도, 선생님의 한숨의 길이까지 느껴버리는 심성이다. 그래서 세상이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르고, 더 세게 다가온다.
사실, 생각이 많은 건 예민함이 아니라 감정의 해상도가 높은 것이다. 문제는 그 해상도가 높을수록 피로감이 크다는 것에 있다.
모래 한 알까지 보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약한 모래바람조차 견디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 안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아이는 숨이 차서 헐떡이는 것 또한 당연하고.
“라라야. 그렇게 생각이 많으면 힘들지 않아?”
라라에게 더 묻기로 했다. 라라 스스로가 느끼는 본인의 상태를 본인의 단어로 표현해 내길 기다리기로 했다.
동시에 나는 나도 기다린다.
라라의 고민을 듣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의 머릿속엔 퇴근 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생각이 화수분처럼 샘솟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언어로 꺼낼 때까지 '생각 멈추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혼자 앉아 일기장을 꺼내 생각을 적는다.
아까 내가 분명 인사를 했는데 민국장님이 그냥 지나쳤단 말이야, 지나칠 수 없었던 각도인데. 설마 지난주에 내가 보고를 따로 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셨던 것이 아직도 감정에 남아 있는 걸까. 아님 설마, 지금 비상시국에 나 혼자 5시에 퇴근한다고 그러시는 걸까. 아니, 나의 조퇴는 일주일 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거라고 #$%@%^%^&*^*
걱정거리, 생각거리를 쭉 적다 보면 나의 고민거리가 얼마나 하찮고 별 볼일 없는지 날 것으로 다가오니까.
“엄마! 나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도 안 와!! 내 말 듣고 있어?!!”
라라의 말에 짜증 대신 공감의 기술도 써 본다.
“그러게. 엄마도 걱정이다. 나 어렸을 때는 말이야 기도도 했어. 하느님! 제 머리 좀 쉬게 해 주세요!”
“정말?!!”
라라는 신이 난다. 자신과 닮은 엄마를 보며 안도하는 것이리라. 그런 라라의 모습에 나한테 받은 기질적인 것이 원인인 거 같아 난 또 걱정이고.
불안을 느끼고 생각이 많아지는 걸 결정하는 건 유전이 아니라 인지 방식과 경험이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을 눈으로 확인하고 전공으로 습득을 하고서도 생각은 계속 많아진다.
나는 내가 왜 생각이 많은 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해서다. 상황을 예측하고 실수를 방지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해서다. 그리고 또 예측치를 벗어난 일들이 발생하면 또 다른 생각들로 통제하려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반추(cognitive rumination)라고 부른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보다는 불안의 확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감정이 다시 생각을 불러오는 무한루프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흐름을 끊어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잘 안된다. 세상은 생각보다 예측을 벗어나는 일들이 많고 타인의 행동과 감정은 늘 내 생각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 불안을 버티는 법을 몰랐던 나는, 어린 라라에게 내 내면에 보내는 신호와 같은 주파수의 신호를 보냈던 거 같다.
“조심해.”
“그렇게 하면 다칠 수 있어.”
“준비는 충분히 했니?”
사랑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불안과 걱정을 아이에게 심어준 것은 아닌가 해서 지금에서야 깊이 반성 중이다.
라라는 내가 불안을 다루는 방식을 보고 ‘감정의 언어’를 배웠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모든 순간들이 라라에게는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 학습되는 증거들이었을 것이다.
라라는 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을 도전한 경험이 적다. 그래서 실패보다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두려워하는 빈도가 높다. 정확하게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통제력 상실’에 대한 불안이다.
생각은 경험의 통로여야 한다. 생각이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창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생각을 ‘통제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생각하면 실수하지 않을 거야’, ‘생각하면 상처받지 않을 거야.’
착각이었다. 생각은 상처를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라, 상처를 오래 붙잡는 자물쇠 같은 것이었다.
통제의 도구가 되는 순간 생각은 인간을 조종하게 된다. 생각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에 제동이 걸리고 생각 때문에 좀 더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에 한계가 생긴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라라에게는 좀 더 일찍 알려주고 싶다.
‘생각 많은 습관’은 유전이 아니라,
‘배운 감정의 패턴’이다. 그러니 아이의 감정 패턴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다.
닉 트렌튼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생각에 대한 태도를 바꿔라.”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작가가 시키는 대로 아이와 함께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1) 걱정 일기장
매일 밤, 나는 라라와 노트를 펴고 ‘오늘의 걱정’을 쓴다.
“내일 발표 망칠까 봐 걱정돼.”
“엄마는 내일 보고하다 말이 꼬일까 봐 걱정돼.”
그렇게 서로의 걱정을 나란히 적는다. 그리고 다음 날, 그 걱정이 현실이 되었는지 확인한다.
모두 다 알겠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라라와 나는 역시 걱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며 깔깔 웃었다.
2) 걱정 시간 정하기
라라의 걱정 빈도를 줄이기 위해 ‘걱정 시간’을 정했다.
“지금부터 5분만 걱정하자. 5분이 지나면 끝.”
타이머를 켜고 걱정에 집중한다.
시간이 되면 라라가 외친다.
“걱정 끝!”
그 짧은 5분이 라라에게는 통제의 경험이 된다.
걱정을 없애려는 힘보다, 걱정을 멈출 줄 아는 힘이 더 현실적이다.
3) 현재에 머무는 연습
퇴근길,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 회사에서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금은 퇴근길이다.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오늘 하늘이 참 예쁘다.”
현재형 문장은 생각의 폭주를 잠시 멈춘다.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아닌 ‘지금’을 느끼는 순간, 생각은 제자리를 찾는다.
라라에게도 이 연습을 시킨다.
“라라, 지금 뭐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응아를 하고 있지."
“그럼 그걸 그냥 느껴보자.”
라라야, 너는 엄마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생각이 많은 아이야.
그건 나쁜 게 아니야. 그건 라라가 마음이 깊고, 사람을 잘 느끼는 아이라는 뜻이야.
친구가 조금만 표정을 바꿔도
“무슨 일 있나?” 하고 눈치채는 라라,
엄마는 그런 너를 보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건 정말 멋진 능력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마음이 피곤해질 때가 있지?
그럴 땐 이렇게 해보자.
엄마가 말했던 풍선 기억나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이나 생각을 하나씩 풍선 안에 넣는 거야.
그리고 “후~” 하고 불어서 하늘로 날려 보내.
풍선이 점점 멀어질수록 라라 마음도 점점 가벼워질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해봐.
“이건 잠깐만 생각하고, 나머진 풍선이 가져가게 하자!”
엄마도 생각이 많을 때가 있거든.
그럴 때마다 라라처럼 풍선을 날려보면서 연습해.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괜찮아. 생각이 많아도 괜찮아. 나는 원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니까.”
생각이 많아도 괜찮아. 그건 네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다만, 그 생각 속에서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나는 이렇게 복잡할까”가 아니라,
“나는 세심하게 느끼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줘.
생각이 많은 건 병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가 풍부한 재능이야.
그 재능이 너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게, 생각이 쌓여서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엄마가 네 곁에서 가벼워지도록 도와줄게.
같이 가볍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