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처럼 살지 마>
퇴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늘 피곤하다.
하루 종일 보고서를 쓰고 고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일을 조율하고 갈등을 중재하느라 주름 잡힌 미간이 펴질 틈이 없다.
(직주근접도 아니어서) 통근 시간만 2시간, 도어투도어로 따지만 50분 동안 몸을 구겨 넣어 탄 지하철에 내려도 또 1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면 라라가 소리친다. “엄마 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하면서도 딸 아이에게 못해준 일만 떠올라서 집에 가면 더 많이 놀아 주고, 더 성심 성의껏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다짐하건만.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아이가 팔과 다리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그 간의 반성이나 다짐 따위 무색할 정도로 표정이 일그러진다.
"라라야 엄마 피곤해.”
6살 땐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더 악착같이 매달렸고,
7살 땐 내가 그려먼 “엄만 맨날 피곤하대!”하며 울먹였고
8살인 지금은 표정 변화 없이 그런다. “왜 또. 우울했어?”
아이의 눈에 지하철 유리창에서 본 얼굴보다 더 험하고 더 볼품없는 나의 표정이 비치는 순간이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감정에 따라 아이의 불안이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니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우란의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진실이 숨어 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듣기보다 표정을 읽고 훈육의 이유보다 한숨의 결을 먼저 느낀다. 나는 딸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려고 애썼지만 정작 내 감정은 자주 불안정하다. 불안은 언어보다 빠르게 전염되는 바이러스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전달’처럼,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의 파동이 존재한다.
직장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늘 ‘두 개의 나’로 살아가는 일이다. 하나는 회사에서 성과를 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리더로서 침착해야 하는 나. 또 하나는 집에서 엄마로서 다정해야 하는 나. 감정은 스위치처럼 쉽게 전환되지 않는다. 회의에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억눌렸던 분노가, 퇴근 후 딸아이의 사소한 떼쓰기에 엉뚱하게 터져 나오기도 한다. 나는 “그만해!”라고 소리치고, 곧 후회한다. 그 순간 딸의 얼굴은 세상 모두를 다 잃은 표정이다. 위니컷이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가 된다는 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지만 그 ‘괜찮음’의 기준을 만들지 조차 못하는 게 현실이다.
나는 내 딸이 나처럼 불안하지 않기를 바란다. 철저히 대비하고 꼼꼼하게 확인해 받을 수 있는 상처를 최소화하고, 연약한 자신을 의심하거나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늘 통제했다. 잘 자야 한다, 골고루 먹어야 한다,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한다.
좋은 의도였지만 그 통제 속에 ‘엄마의 불안’을 숨기려는 시도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안정적인 애착을 통해 세상에 대한 신뢰를 쌓는다.’는 심리학자 보울비의 애착이론에 따르면 난 빵점이다. 그 애착의 핵심은 ‘엄마가 얼마나 안정된 존재로 느껴지느냐’이기 때문이다.
라라가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우고 울고 돌아온 날, 나는 “괜찮아, 다음엔 잘 놀면 되지”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에서는 ‘혹시 아이가 따돌림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퍼졌다. 그날 밤, 딸은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다. 몸은 내 품에 있었지만 마음은 내 불안을 따라 어딘가 멀리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의 수면 패턴, 식사 습관, 표정 변화 하나하나가 내 감정의 미세한 기류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늘 괜찮은 척, 집에서는 아이 앞에서 웃는 척. 하지만 감정은 결코 속일 수 없다. 미세한 긴장감, 목소리의 떨림, 눈빛의 변화는 아이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감정의 언어는 말보다 정직하다. 그걸 알게 된 이후로 이제는 아이 앞에서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려고 한다. “엄마 오늘 회사에서 좀 속상했어. 하지만 괜찮아. 내일은 나아질 거야.”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놀랍게도 조용히 내 옆에 와 앉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는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에서 비롯된다.
아이의 성장 과정은 결국 엄마의 ‘정서적 거울’을 통해 형성된다. 심리학자 다니엘 스턴은 이를 ‘정서 조율(emotional attunement)’이라고 불렀다.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면, 엄마는 그것을 인식하고 반응한다. 이 상호작용이 반복되며 아이는 ‘나는 존재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늘 불안하거나 감정을 회피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딸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감정의 온도를 조절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완벽해지려 애쓰진 않는다.
오히려 불안한 나를 인정하는 게 시작이었다. 나는 때로 지치고, 화가 나고, 불안하다. 그건 나쁜 엄마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증거다. 위니컷의 말처럼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엄마”다. 진짜 존재한다는 건, 아이의 감정뿐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도 존중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딸이 말했다. “엄마, 오늘 회사에서 기분 안 좋았지?” 나는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엄마 얼굴이 조금 슬펐어.”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아이는 내 감정을 읽고 이해하려 했다. 그건 마치 우리가 서로의 감정 언어를 배우는 과정 같았다.
내가 아닌 모습을 나처럼 위장하면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껏 외향인인 것처럼, 긍정적인 사람처럼, 털털하고 대범한 사람처럼 굴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집에 돌아외서는 에너지가 모두 방전되어 내향인, 부정적인 기질, 소심하고 걱정 많은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그걸 라라가 봤다. 8살 아이가 이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힘내', '자신감을 가져', '위축되지 마.' '너의 마음과 생각을 크게 또박또박 얘기해.'라고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너무도 쉽게 얘기한다. TV에서도 책에서도 아동심리 전문가들이 그러라고 한다.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세요. 아이에게 할 수 있다고 힘을 실어주세요.
근데 글쎄. 이런 말, 아이에게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위장을 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아이에게 '그런 감정 괜찮다', '슬퍼해도 괜찮다.', '서툴러도 괜찮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더 나아가 이제 나는 라라가 자신만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해석하길 바란다.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탐험의 영역이다. 그 탐험을 가능하게 하려면,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이해해야 한다. 자기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을 심리학에서는 ‘정서적 메타인지(emotional meta-cognition)’라고 부른다. 아이가 감정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는 건 엄마가 자기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때 가능해진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충분히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다짐한다. 그런 엄마의 옆에서 자라는 아이는 완벽함 대신 진정성을 배운다. 내 불안, 내 눈물, 내 웃음 모두를 통해 아이는 인간의 복잡함을 배운다. 이게 진짜 교육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저녁이 되면 딸이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말한다. “엄마, 내일은 뭐 할까?” 그럴 때면 나는 대답한다. “모르겠다, 우리 내일 생각하자.” 불안한 미래 대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보자고, 그렇게 가르치고 싶다. 아이가 커서 언젠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그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는 “엄마는 늘 자기 감정을 알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기억이 남길 바란다.
나는 요즘 내 감정을 맛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감정이 현실을 압도해 나의 하루 전체를, 인생을, 나의 전부인 라라를 삼켜버리지 않길 바래서다.
나의 감정은 달콤한 날도 있고, 쌉쌀한 날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맛이 라라에게 흘러들어가 그녀의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다해 나의 감정을 살피고, 가끔은 조용히 다독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충분히 좋은 엄마다.
그리고 내 딸은, 그런 나를 먹고 자라며 스스로의 맛을 찾아갈 것이다. 그녀의 인생이 언젠가 달고 짜고 쓰고 매운 모든 맛으로 가득 차더라도 그 맛 속에는 늘 ‘사랑’이라는 향이 은은히 배어 있기를 , 그래서 오늘도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끌어안고 부비고 깔깔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