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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강 Sep 18. 2020

친절은 바람을 타고

올해 여름은 더욱더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어

미용실에 들렀다가 바로 옆 문구사에 들렀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나는 문구사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 질감이 다른 색색의 종이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칸에서 한참 머물게 되고 종류도 많은 볼펜을 주르륵 그어보며 신나 한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만들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뭐 특별히 만들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이들과 늘 함께 하는 나로서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좋은 것이라고 해두자.



특별히 살 것이 없었지만 한 바퀴 돌고 빈손으로 나오기가 미안해서 핀 만들기 재료 하나 골라 계산대에 섰다. 점원 둘은 멋쟁이 아주머니 한 분과 얘기하느라 아직 나를 못 봤다. 아주머니는 가게 문에 걸어둘 팻말을 찾고 있었다. "첫째 주 일요일, 셋째 주 일요일. 정기휴일"이라는 문구를 쓴 팻말을 찾는데 딱 맞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첫"자, "셋째 주"자  그리고 "일"자를 써달라고 점원들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남자 직원이 깜짝 놀라며 거절했고 젊은 여자 점원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자 점원이 내 것 먼저 계산을 해주고 다시 아주머니에게 갔다. 셋은 또다시 펜을 들었다 놨다 할 뿐 아무도 쓰려고 하지는 않았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아주머니는

 "혹시 글씨 잘 쓰는 사람 없나?"

라고 혼잣말하듯이 했다. 뒤돌아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내가 써 줘야 하나?', '혹시 실수해서 틀리면 어떡해'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나의 발길은 그들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가 써야 한다고 결정해 버린 것이다.
  "제가 써 드릴까요?"

했더니 점원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나에게 굵은 펜을 넘겨주었다. 비닐을 벗기지 않고 그 위에 연습으로 써보았다.

 "이렇게 쓰면 될까요?"

했더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겉포장을 벗겨주었다.  

쓱쓱쓱~ 원판 위에 세로로 "첫째, 셋째 주, 일" 여섯 글자를 써 드렸다. 셋은 무슨 큰 과업을 해결한 듯 나를 향해 연신 고맙다 했다. 나는 멋쩍은 인사를 하고 나오며 모른 척하지 않고 참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별 거 아닌 친절이지만 그분들을 활짝 웃게 해 드린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작년 여름 친절한 부채를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이었다. 산행을 좋아하는 몇몇 이웃과 상당산성까지 걸었고 내려올 때는 버스를 타고 오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마침 출발 시각이었는지 버스가 출발하려 했다. 달려가 버스에 앉으니 땀이 주르륵 흘러서 손부채를 연신 흔들어대며

"와, 정말 덥다 더워."

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앞자리의 아주머니가 뒤를 돌아보시더니
"많이 덥죠? 이걸로 더위를 식히세요."

하시며 부채를 건네주셨다. 나보다 연세가 더 있으신 분이 건네는 부채를 받을 수가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한사코 부채를 내미시며

 "아휴, 별거 아니에요. 쓰고 버려요."

라고 하셨다.

나는 커다란 부채를 이쪽, 저쪽으로 휙~휙~ 부치며 금세 땀을 식혔다. 일행들에게 바람을 전해주니 모두들 시원해했다. 잠시 후 부채를 돌려드리자 아주머니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가지라고 했다. 은행 광고용으로 누군가 낙서까지 해 놓은 부채였는데 나는 금방 버릴 수가 없었다.  



문구사에서 낯 모르는 아주머니에게 글자를 써주고 나오는데 그때 일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낯선 아주머니가 건네주신 친절한 부채 바람을 오늘 다른 이에게 이어준 것은 뿌듯함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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