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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May 14. 2019

이 애가 과연 너의 자식인가?

<사울의 아들>, 생명의 숭고함을 향한 발악.

▲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이상하게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퍼스트맨>이었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달 착륙'은 스펙타클이 될 수 있지만 '아우슈비츠'는 스펙타클이 될 수 없다. 아니, 되어선 안된다. 사건에 접근할 때 <사울의 아들>은 훨씬 조심해야 한다. 다루는 인물의 위치에도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닐 암스트롱은 유일한 주인공이지만, 사울은 수많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큰 사건보다 그 가운데 있던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인물에게 오롯이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물론 <사울의 아들>이 먼저 개봉했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가까운 거리의 인물에 초점을 맞춰놓는다. 멀리 배경만 초점이 흐려진 상태에서, 카메라 앞으로 인물이 다가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이미 '이 인물만 조명하겠다'는 감독의 선언이다. 롱테이크와 핸드헬드를 통한 현장감, 그리고 몰입도도 중요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인물을 향한 집중'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인물의 배경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은 전부 흐릿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빼지 않고 전부 보여준다. '고문 포르노'가 되지 않도록 흐릿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그 참상을 빠짐없이, 구석구석 비추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박제하지 않으면서 잊지 않으려 하는, 필자는 영화의 이런 태도에게 박수를 보낸다.




 주인공 '사울'에게서 초점이 벗어나는 장면은 대화 장면을 제외하고 전무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두 장면이 있다. 두 장면은 각각 영화의 시작과 끝이다. 모두 아이가 등장하는데 알 수 없는 유태인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알 수 없는 독일인 아이의 생존으로 끝난다. 이 두 아이의 의미하는 바가 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시작에서 죽은 아이는 영화의 흐름을 이끄는 존재다. 가스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독일군들이 데려가고 사울은 문틈으로 지켜본다. 독일군 의사는 간신히 살아있는 아이의 상태를 진단하고는 입을 막아 죽인다. 사울은 아이의 죽음을 목도한 후, 아이를 유태인 방식에 따라 묻겠다는 신념 하나로 행동한다. 아이의 부검을 막기 위해 시신을 숨기고, '제대로' 묻기 위해 기도해줄 랍비를 찾아다닌다. 만약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거쳤을 단계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사울은 목숨을 걸고 행동한다. 그럼 이제 관객은 묻는다, "왜". 처음에는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라고 사울이 답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사울은 냉정하다. 고통 속에서 무뎌진 것이라 추측하던 중 동료가 이야기한다. "너는 아들이 없잖아". 이 시점에서 우리의 시선은 '왜'에서 '어떻게', 즉 이 '인물의 태도'에 놓여야 한다. 이런 사울의 행동은 일종의 종교와도 같다.


'엘 그레코'가 그린 사도 바울

 '사울'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사도 바울'로 성경에서 알고 있는 그 사람이다. 사울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후 '바울'이란 새 이름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다. 작중 사울은 아이의 죽음을 목도한 후 아이를 제대로 묻겠다는 결심을 한다. 즉 이 아이를 향한 '바울'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는 동료들에겐 아직 '사울'일뿐이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때 '바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는 이미 '바울'이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후에 결국 존더코만도(독일군이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선별한 유태인들, 원치 않게 앞잡이가 된 대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아니 사실 그 특권도 거짓이었다)들이 본인들도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수용소를 뒤집는다. 그런 혼란 틈에서 사울은 아이의 시체를 들고 빠져나가다, 독일군에게 뒤쫓겨 시체를 땅에 묻지 못한다. 시체를 들고 도주하던 도중 강을 건너고, 그 강에서 시체를 잃어버린다.


 이 시체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사울은 '바울'로서의 정체성을 잃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강박에서 해방되기도 한다. 자기 결여와 동시에 구원이 찾아온 것이다. 시체를 잃어버린 곳이 '강'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애초에 물(양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 않은가?


▲ <사울의 아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같이 강을 건넌 동료들과 빈 오두막에 잠시 몸을 피하던 도중, 문 밖으로 독일인 아이(독일인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독일의 보호를 받는 위치에 있다)와 눈이 마주친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처음 사울이 아이의 죽음을 목도할 때와 구도가 같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완벽한 대구를 이룬다.


 카메라는 사울의 얼굴로 시점을 바꾸고, 사울은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이때부터 카메라는 사울에서 독일인 아이에게로 시점을 바꾼다. 독일인 아이는 도망가다가 독일군을 마주치고, 독일군은 아이를 보호하며 오두막으로 향한다. 곧이어 총성이 들리고, 아이는 풀숲으로 도망가며 멀어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울의 미소, 그리고 독일인 아이의 존재이다. 이때 이 미소는 생명(독일인 아이)을 보며 느끼는 일종의 경이가 담겨있다. 근거는 엔딩 크레딧 속에서 찾았는데, '사울의 아들' 역할에 두 명의 이름이 있다. 즉, 그 독일인 아이도 사울의 아들인 것이다. 제목인 '사울의 아들'은 희생된 무명의 유태인 아이들을 향한 위로이기도, 살아있는 생명을 향한 경외의 명칭이기도 하다. 아이 죽음 목도를 통한 재탄생, 시체 유실을 통한 구원, 그리고 생명의 발견을 통한 구원의 확신까지. 예술적이고도 숭고하다.




p.s.


 어떤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길 때, 조심해서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재미있다'이다. 이번 <사울의 아들>처럼 정말 좋고, 지루함 없이 본 영화라도 '재미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영화도 좋지만, 사람들이 '좋은' 영화를 더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


생명의 숭고함, 그 신념을 위한 발악
★★★★☆(9.5/10)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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