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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Nov 06. 2019

고풍스러운 로맨스의 절정, <모리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자들의 아련하고 찬란한 사랑

 어떤 영화에 접근할 때,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영화가 이야기하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혐오나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를 평할 때 종종 ‘결국 사람 보편의 이야기’식의 이야기를 마주한다. 예술이 결국 인간을 탐구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에 당연히도 ‘사람의 이야기’가 맞지만 이런 평은 태도 면에서 나이브하고, 나아가 폭력적이다. 그 영화가 다루는 ‘소수자, 약자’라는 텍스트를 무시하고 ‘페미니즘의 대두, 퀴어 인권의 대두’라는 컨텍스트를 배제하는 방식의 평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야기 이전에 여성의 이야기이고, 인간 보편의 이야기이기 전에 성소수자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보다 조심스럽게 이런 영화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퀴어시네마는 소수자 인권이 점점 주목받는 현대에 올수록 사회와의 갈등 이외에 다양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보다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퀴어시네마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의 퀴어시네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소수성’의 테마이다. 퀴어는 지금까지 계속 소수자로 존재해왔다. 퀴어가 소수자란 이유로 받아온 차별, 억압, 그리고 혐오의 역사는 자연스레 사회와의 갈등을 빚어냈다. 그런 갈등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그 사회성이 퀴어 예술의 기저를 받치고 있고, 퀴어 예술이 지닌 가치의 큰 축을 맡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국내에서 최초로 개봉하는 <모리스>도 이런 흐름에 속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모리스>는 주인공 ‘모리스 홀(제임스 윌비役)’이 대학에서 ‘클라이브 더햄(휴 그랜트役)’을 만나 동성애에 눈을 뜨는 이야기이다. 모리스는 독실한 기독교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한, 말 그대로 전형적 엘리트 코스를 밟은 모범생이다. 그랬던 모리스는 우연히 클라이브를 알게 되고, 클라이브와 사랑에 빠진다. 주입 받아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고, 조금 두려워하지만 어느새 그 사랑에 깊게 빠지게 된다. 여기까지는 어느 사랑 영화와 다를 바 없지만, <모리스>가 본연의 특색을 가지는 것은 이 이후의 시점부터이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 이하 마지막 두 문단을 제외하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모리스>는 둘만의 감정을 심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세계관을 좀 더 확장한다. 이 확장의 기반에는 둘의 사회적 지위가 큰 역할을 차지한다.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모두 사회적으로 명예와 명성이 있는 귀족들이다. 동성애가 ‘풍기문란죄’로 법적 처벌을 받던 1910년대에, 귀족들은 그 명성에 타격을 입는 것만으로 삶을 잃는다. 영화는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친구인 ‘리즐리’를 통해 그 사실을 보여주고, 그로 인해 클라이브가 심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영화의 흐름은 변화한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클라이브는 리즐리를 통해 모리스와의 사랑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끝날 수 있음을 직감하고, 점점 모리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사실 이전부터 클라이브가 사회적 지위를 더 중시했음을 암시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바로 ‘스킨십’이다.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와의 육체적 사랑을 전부 거절했다. 클라이브는 이 사랑이 플라토닉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으며,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모리스는 그 이상을 원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생겼고, 클라이브가 리즐리의 재판을 목격한 순간이 그 씨앗을 싹틔운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모리스가 틀에서 탈출해 점점 더 깊은 관계를, 더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는 인물로 변모했다면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틀에서 끄집어냈음에도 리즐리로 인해 스스로 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인물상(象)의 전도는 둘의 관계를 갈라놓는다. 결국 클라이브는 다른 여자를 만나 곧바로 결혼하고, 모리스는 클라이브 저택의 일꾼 중 한 명인 ‘알렉 스커더(루퍼트 그레이브스役)’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모리스는 지금까지 클라이브와의 관계에서 겪지 못했던 육체적 사랑을 알렉으로 인해 경험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가 과거에 받은 상처와 동일한 이유로 알렉과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클라이브가 명예를 택하며 상처받았었는데, 그 자신이 명예를 취하며 하층민인 알렉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화는 이처럼 귀족만의 세계에서 하층민의 세계까지 시선을 확장하며 담론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영화는 이렇게 이들이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랑의 과정에서 역경을 겪는 원인을 전통적 성 관념, 특히 ‘남근주의’에 두고 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바로 ‘남근’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남성 교사가 사춘기 소년에게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빙빙 에둘러 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남성-여성의 결혼으로 맺어지는 전통적 관계를 이상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주입하는 모습과 함께, 남근을 강조하는 남근주의 세태의 모습을 한 시퀀스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장면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는 지속해서 남근주의가 깊게 뿌리내린 사회의 단면을 넌지시 비추며 이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목소리를 내비친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영화는 결말에서 특별히 힘을 싣지 않는다. 결국 알렉을 다시 만나러 가는 모리스, 그런 모리스와 재회에서 사랑을 나누는 알렉을 영화 특유의 담담함으로 그려낸다. 다만 영화는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을 벗어나는 시도를 하며 좀 더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데, 바로 모리스가 아닌 클라이브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음을 통해서이다. 사실 모리스보다 흥미로운 인물은 클라이브이다. 주인공을 구원한 존재지만 결국 사회의 시스템에 순응한 존재이고, 나아가 주인공에게 순응을 강요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말부에서 그는 이성애자로 돌아온 줄 알았던 모리스가 알렉을 만나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영화는 모리스와 알렉이 재회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 아내와 있지만 근심하는 클라이브의 표정으로 막을 내린다. 결국 이 지점은 영화가 클라이브를 영화 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의 관객처럼 여기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다. “당신은 어떤가요?”.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또 <모리스>는 결말뿐 아니라 영화 특유의 서사와 편집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모리스>에는 서사와 편집 측면을 바라볼 때 다소 의아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관객의 예상보다 넓게 벌리며 이야기 간의 비약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리스>에서 이 비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은 그 비약의 섬세한 조절에 있다. 한 쇼트 안에서 스코어를 최대한 절제하며 화면 내의 감각, 특히 촉각과 청각을 세심하게 담아내며 관객을 감정에 몰입시키고, 쇼트와 쇼트 사이를 관객이 느낀 감정을 통해 스스로 채워나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즉 관객은 능동적으로 그 간극을 역추적하며, 동시에 그 감정을 더 내밀하게 느끼는 것이다. 진정한 영화적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비치는 쇼트의 단면이 아니라, 관객이 머릿속에서 능동적으로 재구성할 때 탄생한다.


▲<모리스> 스틸컷 ⓒ알토미디어


 <모리스>는 비록 1987년도, 꽤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그 섬세함은 요즘의 여느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을 맡았던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과거에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연출과 각본을 모두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맡은 <모리스>는, 그가 각본을 맡았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비교했을 때 좀 더 대담하고 도전적인 영화지만 동시에 특유의 섬세함은 이때부터 여전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극장에서 이 찬연한 세공물을 마주하며 경험하는 1900년대의 고풍스러운 영국은, 아련하면서도 찬란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

전문: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392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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