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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Dec 27. 2019

여성, 그리고 예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예술에 관한 담론이 사랑으로, 그리고 사람으로.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예술은 공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사적이다. 공개된 예술 작품은 많은 사람이 향유한다는 점에서 공적이지만 또 개개인에게 각자 다르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사적이다. 작품의 감상자는 개인의 경험이나 가치관, 감상 당시의 기분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수용하며 개인의 내면에서 그 작품을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은 전시되는 그 상태 자체로도 존재하지만, 수용자들의 내면에서 다시 한번 재구성되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술을 더욱더 깊게 감상할 수 있고, 더 깊게 매료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 내면을 좇는 영화이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시작은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없는 스케치의 파편들로 시작한다. 다른 어떤 소리도 배제한 채, 다른 어떤 시각적 요소도 배제한 채 오직 펜과 캔버스의 마찰음만 들리고, 펜이 남긴 흔적들 일부만 시야에 담긴다. 특히 이 장면이 흥미로운 까닭은 새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 화면의 새하얀 배경이 과연 영화 자체의 빈 배경인지, 아니면 카메라가 캔버스를 비추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어떤 대상을 ‘카메라로 그려내겠다’라고 말하는 선언처럼 다가오는데 과연 그 대상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다음 장면에 등장한다. 앞선 스케치 장면은 연습생들이 한 모델을 그리는 것이었고 그 모델은 바로 마리안느, 연습생들을 가르치는 화가였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그러면 이 영화가 마리안느만을 그리는 영화인가, 영화는 곧바로 그 질문에 아니라 대답한다. 연습생들이 마리안느를 그리던 와중 마리안느는 연습생들 뒤에 놓인 한 그림을 발견한다. 마리안느는 연습생들에게 저 그림을 누가 꺼냈냐고 묻고 한 연습생이 대답한다. 그리고 그 연습생은 마리안느에게 그림에 관해 묻는다. 그때 마리안느가 그림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결국 영화는 마리안느를 그리는 영화지만 동시에 마리안느가 누군가를 그려나가는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엘로이즈’, 마리안느와 함께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앞서 마리안느가 그림의 제목을 이야기한 뒤 영화는 마리안느의 회상으로 이동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녀원에 있던 엘로이즈가 언니의 죽음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엘로이즈를 결혼시키려 한다. 당시 결혼을 시키기 전에는 초상화가 필요했고,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계속 화가를 고용하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지만 엘로이즈가 이런 상황을 알고 초상화를 거부하고 지우려 하자,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마리안느를 고용할 때 특별한 조건을 내세운다. 바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엘로이즈에게 들키지 말 것”. 이런 조건 때문에 마리안느는 산책 동무로 위장하여 그녀와 함께한다. 마리안느는 그렇게 엘로이즈의 곁에서 들키지 않게 몰래 관찰하며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이 ‘몰래 관찰하며 그린다’라는 설정은 이야기의 별 의미 없는 일부일 수 있지만, 셀린 시아마 감독은 세심한 연출을 통해 이 설정을 감정의 서사에 활용한다. 본디 누군가를 몰래 관찰하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관심의 증상이다. 그 관심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는 행위까지 나아가는 것은 관심을 두고 그 사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면화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도 같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측면을 비추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포착하는 쇼트라든지, 엘로이즈를 추적하며 따라가는 카메라든지 영화는 계속 카메라에 생명력이 있기라도 한 듯 영화가 그려나갈 대상들을 면밀하게 바라본다. 우리의 관심이 향하는 곳에 우리의 시선이 향한다는 사실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카메라는 알고 있는 듯하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결국 완성한다. 하지만 이를 본 엘로이즈는 “이 그림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너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림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마리안느는 결국 이 그림의 엘로이즈를 박박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때 엘로이즈는 본인이 직접 모델을 하겠다며 의외의 선언을 한다. 결국 이 선언은 마리안느에서 엘로이즈로 향하는 단방향적 관계가, 엘로이즈가 능동적으로 그림의 주체가 되며 양방향의 소통으로 발전하는 지점이다. 동시에 마리안느가 혼자 그려나갔던 그림을 엘로이즈가 함께 그리는 의미를 가지는 순간이다. 결국 둘이 함께 완성한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훨씬 더 ‘그녀답게’ 완성된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예술에 관한 영화로 바라보면 오르페우스 신화를 세 명이 함께 논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결국 ‘오르페우스 신화’라는 또 하나의 예술이 세 사람 안에서 어떻게 재구성됐는가, 어떤 의미로 쓰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각자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각자 삶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엘로이즈가 제시한 ‘에우리디케의 주체적 죽음 선택설’은 엘로이즈-마리안의 관계를 에우리디케-오르페우스 관계처럼 다가오게 만들며 둘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정말 뛰어나다 할 수 있는 까닭은 배경 음악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세세한 소리에 집중하고 시각적 요소만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흡입력에 있다. 동시에 감독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만 음악을 사용하며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먼저 수녀 생활로 인해 성가곡만을 접했던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하프시코드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들려주는 장면은 곡의 격정적인 분위기가 둘 사이의 감정과 맞물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또 여성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입히며 동시에 형용하기 힘든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는 영화가 감정의 서사를 치밀하게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마법 같은 순간이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격정적인 감정의 정점은 영화의 결말이다. 둘이 헤어진 뒤, 마리안느는 공연장에서 엘로이즈를 발견한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발견하지 못하고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시점으로 엘로이즈를 다시 바라본다. 공연장에서는 마리안느가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던 ‘여름’ 3악장이 울려 퍼지고 엘로이즈는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처음에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그 감정은 이내 환희로 전환된다. 하프시코드 하나로만 연주되며 미완성이었던 ‘여름’ 3악장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며 완성됐고, 마리안느가 그리던 엘로이즈는 이제 오롯이 독립된 한 명의 여성으로서 웃음 짓는 주체가 됐다. 결국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예술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 지점에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그 가치가 확장된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이전의 퀴어 영화들과는 다소 다르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소수성의 테마가 희미하다. 공간 자체도 사회로부터 고립된 섬이며, 등장하는 인물들도 매우 제한돼 있다. 대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 그 자체에 오롯이 집중한다. 물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1770년의 사회적 금기인 만큼 이 절절한 감정의 기반에는 둘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는 비극성이 깔려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소수성을 가지고 여운을 남기기보다는 두 명의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내며 농도 진한 감정에 관객을 적신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나아가 영화는 진일보한 여성 서사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 남성은 전무하고, 오로지 여성들만이 주체가 되어 극을 이끌어나간다. 하녀 ‘소피’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엘로이즈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엘로이즈가 결혼할 대상은 누구인지, 엘로이즈가 이후에 결혼한 대상이 누구인지 절대 관심을, 시선을 두지 않는다. 대신 마리안느, 엘로이즈를 중심으로 하녀 ‘소피’까지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들은 영화 속에서 항상 행동의 주체로 존재하면서, 비극의 피해자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넘어서 꿋꿋하고 살아낸다. 이런 강인한 여성상은 영화적으로도 매력적이며, 나아가 관객에게 큰 감동을 준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중의적인 제목이 아닌가 싶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는 스스로 이를 인지하는 듯 두 이미지를 모두 담고 있다. 왜 ‘타오르는’ 이미지일까. 불의 이미지는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정화의 이미지 또한 담고 있다. 결국, 영화는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격정적인 감정을, 나아가 성장하는 두 인물의 내면까지 담아내며 ‘두 여인의 이야기’라는 본질로 돌아온다. 두 여성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소수자의 이야기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담론을 확장하며 그 모든 지점들을 간과하지 않고 사려 깊게 조명하는 이 영화는 직관적 이미지로 감정의 서사를 치밀하게 쌓고,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통해 쌓아온 감정을 뒤흔든다. 인물을 세밀하고 우아하게 묘사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관객에게 한 폭의 명화로 다가오는 영화가 아닐까. 영화가 우리를 향해 뒤돌아본다.


전문: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478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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