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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Jun 09. 2020

대단한 철학 하지만 무인도에선 당신도 그저 밥일 뿐이야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이 책 2018년도 샀다. 그리고 다 읽기까지 2년이나 걸렸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중고로 샀는데 파신 분이 2014년도에 샀나보다. 근데 문제는 아내한테 선물을 받은 거 같다....ㅋㅋㅋ그리고 그걸 중고로 팔았다. 음...하핫 


1. 사변적 구도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꽤나 많은 결심이 필요하다. 물론 두꺼운 책을 읽는다는 두려움도 있기는 하지만 과정 철학이라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학자의 사상을 배운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사변철학에 있어서 많은 용어를 정립한다. 


그것은 용어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그래야 그 의미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과정철학을 입문하기 어려운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지점에서 이 책을 볼 때는 용어를 미리 정리하고 들어가는 게 좋다. 물론 여기서 하지는 않는다


과정철학은 일반적으로 사변철학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사변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이성 사유를 통한 형이상학적인 접근을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나쁘게 말하면 뭐 탁상공론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가치관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철학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구조를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겠지 


그런 지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독단에 빠져있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 지점이 절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에 있어서 종교에 대한 평가라던가 아니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운동이라던가 그런 지점들이 여전히 비합리적 행동으로 치부하거나 또는 차별에 있어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바를 인정하지 않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관을 합리적 또는 경험적인 것으로 판단할 경우 우리는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사물에 대해서 한 가지 관점으로 밖에 파악하게 되는 오류성을 의미한다.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그것이 오직 일정한 사고의 범주를 예증하는 한에서만 고찰하게 될 경우 문제가 되는 추상성의 정도를 무시한 데 있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60


예를 들어서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 자본주의 원리를 대입하는 생각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윤리적 문제를 대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관점을 통해 추상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하지 않고 오히려 오류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잉성의 정도에 따라서 사이비가 될 수 있다. 그런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물질만능주의나 과학주의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 


과정철학은 근본적으로 현실적 존재, 현실적 계기를 가장 원초적인 단위로 상정한다. 원자나 그 이하 단위를 이러한 현실적 존재로서 과정과 생성을 거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존재는 주체로서는 언젠가 소멸을 겪는 존재이지만 객체로서는 여전히 불멸하는 존재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획득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98


이런 지점을 본다면 우리는 서구철학과 동양철학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유교에서 강조하는 '이름'에 대해서 예를 든다면 공자라는 육체적 존재는 죽고 없어졌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불린다. 그런 지점에서 유교에서 이름에 대한 강조는 매우 집중된다. 그것과 동시에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객체적 불멸성은 공자라는 주체는 죽고 없지만 지금 인식되는 공자라는 객체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서양과 동양의 어느 정도 연결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에 대해 신은 원초적 결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신이 모든 현실적 존재를 품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원초적 결정으로 인하여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영원한 객체를 파악할 수 있다. 


현실적 존재가 어떠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객체로 인해서다. 그리고 신의 원초적 결정은 현실적 존재와 영원한 객체를 직시하고 포함(?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적 존재는 신이 연결해주는 영향으로 인해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영원한 객체를 품고 있는 현실적 주체는, 그때 그 주체의 다른 특이성을 제쳐놓는다면, 다른 현실적 존재와의 직접적 관계는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128


따라서 이러한 구조 속에서 현실적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은 본인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선택은 서로의 영향을 주기에 항상 올바른 본래적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항상 현실적 존재에게 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세계에 악이 발생한다면 자신의 책임을 뛰어넘어 타인에게 악을 발생시킨다. 그렇기에 그런 지점에서 발생한 악은 현실적 존재 단 하나의 개체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쁜 짓 하지 말자 


따라서 우리의 선택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마련이다. 이것을 주체적 지향이라고 언급하는데 현실적 존재가 느끼는 느낌과 파악에 영향을 받는다. n번방 사건에 관련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잘못된 행동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로 인해 생긴 악은 이제 우리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느끼는 바는 느낌으로 그리고 파악으로 선택하게 되며 우리는 그 가운데 본래적 선을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감히 말한다면 그것은 n번방 사건이 덮이지 않고 잘 해결되고 또한 피해자가에 더 이상 피해가 나타나지 않도록 연대하고 함께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모든 현실적 사물이 창조적 활동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같이 객체적 불멸성을 향유하는 객체라는 것, 그리고 모든 현실적 사물은 저마다 자기가 생겨나온 우주를 파악하는 주체라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151




2. 논의와 적용 

화이트헤드는 2부 논의와 적용에서 합리주의와 감각주의에 대해서 설명한다. 아무래도 합리적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한 또는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된다. 따라서 경험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경험주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의견은 지극히 수용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경험을 감각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칸트에 의해서도 경험은 분명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흄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연스럽다. 


화이트헤드가 경험에 대해 긍정하는 이유는 당연히 현실적 존재라를 개념이 경험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생성과 과정을 거치는 현실적 존재는 경험하는 존재다. 자연스럽게 1초 전의 나와 1초 후의 나는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존재는 서로를 통해 사회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더 다양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1+1은 2가 아니라 그 이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수학법칙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현실적 존재의 감각 여건은 경험의 계시 속에 있다. 그로 인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이러한 경험은 서로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감각 여건은 그것이 경험의 계기 속에서 파악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통합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데에 근거하여, 그 경험 속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165


이러한 경험의 계기 속에서 피조물은 모든 생성 활동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긍정할 수 있다. 경험을 진입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험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그 경험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적 지향"이라 불린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사건에 있어서 그러한 경험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인가 하는 점은 나의 주체적인 판단에 근거한다. 


따라서 경험을 선택하고 인지하는 것은 주체에 의한 것이다. 다만 그러한 선택에 있어서 세계 내 존재하는 악을 근절한다거나 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 안에서 선의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주체적 지향을 긍정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파악은 주체적 형식을 획득하며, 이 주체적 형식은 참된 사물의 정신적 극에 속하는 개념적 파악과의 통합으로 비로소 완전하게 결정적인 것이 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174


화이트헤드가 칸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도 물리적 개념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물론 칸트의 시간과 공간이 뉴턴의 물리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점은 여전한다. 자연스럽게도 화이트헤드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와 뉴턴의 이론을 비판하며 새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뉴턴은 공간과 시간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실재적 가능태를 현실적 사실과 혼동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으로 해석한다. 물체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은 인식과 판단이전에 선행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물리적 장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현실적 사실과 구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적 존재에게 "느낌"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현실적 존재에게 신의 원초적 본성을 드러낸다. 


"느낌을 위한 유혹"에 있어 기본적 요소는 신의 원초적 본성에 대한 그 주체의 파악이다. 여기서 개념적 느낌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과 물리적 느낌과의 통합으로 명제적 느낌이라는 후속 위상이 등장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387


그런 점에서 현실적 존재가 받는 유혹은 신의 원초적 본성으로 인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의 선택은 선을 향할 가능성이 분명하다. 물론 현실적 존재의 자유는 있기 때문에 신의 원초적 본성에 대한 파악은 현실적 존재에게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존재의 선택은 그것으로 인해 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합생의 이론처럼 현실적 존재가 주체적 지향을 통해 다른 여건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생성과 과정을 거친다고 말할 수 있다. 




3. 파악의 이론 

현실적 존재와 감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3부에 파악의 이론에 대해 언급한다.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파악한다는 것은 주체의 인식 속에서 그것을 받아 들이는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가 어떤 여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체적 지향이라고 말한다. 사과를 먹으면 그 과일이 나에게 맛있는지, 맛없는 지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지점이 주체에 의해서 나타나고 주체가 판단하는 지향성을 드러낸다. 


유한한 진리의 가능성은, 현실적 존재의 만족이 다양한 결정적 작용들로 분할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작용이 "파악"이다. 그러나 합생에 대한 공한에서 배제된 것들로 이루어진 부정적 파악은, 긍정적 파악에 종속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파악이 "느낌"이라고 불린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440


긍정적 파악으로서 느낌은 사과를 맛있게 먹는 주체의 지향을 드러낸다. 물론 맛없다고 느끼면 맛있다의 부정적 파악으로서 종속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파악이라는 것은 현실적 존재의 주체적 지향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의 지향은 무엇을 원한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큰 기쁨? 행복? 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또 다른 행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하며 그 합은 나의 선택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주체적 지향은 신의 원초적 본성에 근거하는데 신이 선한 존재로서 더욱 피조물의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주체적 지향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선택을 하는 것은 신의 원초적 본성에 근거한 것이며 그 본성을 주체가 긍적으로 파악하여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느낌과 주체적 파악을 하는 현실적 존재가 공동체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선택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 존재는 생성과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선택은 다른 존재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다른 존재의 선택은 나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느낌은 합생의 과정에 있는 자신의 한 주체의 구조 속으로 다른 사물들을 짜 넣는 작용인이다. 느낌들은 결합체를 구성하며, 이 결합체를 근거로 하여 우주는, 새로운 합생에 의해 항상 쇄신되는 자신의 통일성을 확보하게 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461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선택에 있어서 신의 원초적 본성이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주체가 파악하는 느낌을 말할 때, 즉 주체적 지향에 있어서 최초로 경험되는 느낌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느낌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어떤 한 주체가 품고 있는 "단순한 물리적 느낌"은 단일의 현실적 존재를 그 최초의 여건으로 하면서, 이 후자의 현실적 존재가 품고 있는 별개의 느낌을 그 객체적 여건을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469


최초의 느낌과 신의 원초적 본성은 다른 것이다. 최초의 느낌은 최소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은 물리적 조건에 있어서 최초로 경험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최초의 여건이 객체적 여건이 느낌의 주체로서 객체회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느낌이 전달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명제의 형태로 전달된다. 따라서 명제와 느낌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느낌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의식의 통합으로써 "명제적 느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명제는 물리적 느낌과 개념적 느낌의 통합에서 파생되는 복합적 느낌의 여건을 형성하고 있는 존재로서 경험에 개입해 온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504


명제적 느낌으로 드러나는 것은 창조성의 관점에서 피조물에게 창조에 관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의식의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나타난 명제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적 존재의 합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피조물의 느낌이 복합적이라는 점에서 합생은 더욱 큰 것을 도출해낸다. 따라서 의식의 종합인 명제를 받아들이는 현실적 존재가 그것을 더욱 합생시켜 더욱 조화로운 내용을 도출시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명제는 언어적 진술로 표현된다. 즉 개념적 패턴이 술어적 패턴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말한다. 언어로 전환된다는 것은 주체의 경험보다 더욱 큰 고차원적인 위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변환된 지각의 느낌이 사례를 제쳐놓고 지각적 느낌을 갖는 파악 주체에 대하여 고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베르그송의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순수한 물리적 목적의 단계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파악에 대한 논의는 분명 중요하다. 




4. 연장의 이론 

4부에 들어와서 화이트헤드는 연장에 대한 사유를 언급한다. 현실적 존재의 만족을 위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으로 분할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합생의 분할이라 말할 수 있다. 합생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적 존재의 어떠한 여건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 지향을 통해 산출되는 어떠한 더욱 큰 것이다. 뭔가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잘 몰라서 그렇다. 


현실적 존재는 물리적 계기를 통해서 세계를 지각한다. 현실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물리적 계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과학에 따른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 실증만을 말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오류를 낳게 되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계기를 주어진 존재로서 형태론적으로 고찰해 볼 때, 그 자각적인 결합은 그 계기 자신의 입각점의 연장적 가분성 때문에, 그리고 다른 현실적 계기들의 연장적 가분성 때문에 가분적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557


따라서 이것은 '연장'의 의미에서 이루어진다. 가분성이라는 말이 자각적인 결합 속에서 현실적 존재의 속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 존재와 결합을 통해 새로운 여건을 만들어낸다. 즉, 연장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은 화이트헤드가 또한 유기체적 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연장한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유기체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화이트헤드는 연장의 의미를 서로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공동체를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말한다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연기설 관점과 혼동될 정도의 의미는 아니지만 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다른 요소들도 충분히 유기적이라는 점이다. 생성과 과정의 측면에서 말이다. 


공간의 연장성은 실제로는 연장의 공간화다. 그리고 시간의 연장성은 실제로 연장의 시간화다. 

(중략)

유기적인 연장적 공동체라는 자연의 개념은 마찬가지로, 자연이란 결코 완결적인 것이 아니라는 본질적인 관점을 간과하고 있다. 자연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 간다. 이것이 자연의 창조적 전진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559


연장은 자연이 유기체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합생은 이러한 유기체적인 관점 속에서 현실적 존재가 경험하는 여건들이 더욱 풍성한 여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건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 역시 연장이 다른 여건과 결합을 통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5. 최종적 해석 

드디어 마지막 최종장에 들어왔다. 사실상 이 부분을 보기 위해 앞의 수많은 시련을 거쳐왔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이 장을 기다렸느냐? 그것은 드디어 이 지점에서 종교철학적인 개인적으로는 신학적인 담론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특별할 정도로 공감이 간다. 


부동의 동자로서 신의 관념은 적어도 서구 사상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되었다. 탁월하게 실재적인 것으로서의 신의 관념은 기독교 신학이 애호하는 학설이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648


물론 개혁신학자나 아니면 전통적인 신학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평가가 다소 달갑지 않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지점은 이러한 부동의 원자로서 해석한다는 흐름이 세계에 직면한 그리고 현실적 존재에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신 역시 현실적 존재로 구분한다. 물론 현실적 계기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계기는 '사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신은 유일하게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에 현실적 존재라는 말로만 사용한다. 그러한 존재가 맨 위에 언급했던 원초적인 본성과 결과적인 본성을 함유하고 있다. 


원초적인 것으로서 고찰될 경우, 신은 절대적으로 풍부한 가능태의 무제한적인 개념적 실현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창조와 더불어 있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650


신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그와 동시와 우리에게 영향을 주신다. 그 영향은 억압적이고 강제적이고 운명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느낌을 위한 유혹을 하신다. 우리가 스스로 이끌릴 수 있고 또한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유혹하신다. 현실적 존재의 선택이 신의 원초적인 본성과 가까울 수 있도록 우리의 주체적 지향을 올바른 선으로 유혹한다는 것이다. 


신의 본성은 양극적이다. 신은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을 갖고 있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의식적이다. 그것은 신의 본성의 통일에 있어서의, 그리고 신의 지혜의 변형을 통한, 현실 세계의 실현이다. 원초적 본성은 개념적이며, 결과적 본성은 신의 물리적 느낌들이 신의 원초적 개념들 위에 짜여 들어간 것을 말한다. 
-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중에서 - p.653


신을 우리와 가까이하는 존재로 말한다는 것은 신의 공감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의 본성은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또한 받는다. 그로 인하여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신의 유혹에 입각하여 선택하는 한 유기체적 세계에 악은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의 관념은 세계를 바라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주의적 종교론일 것이다. 물론 화이트헤드가 언급하는 말은 아니지만 데이비드 그리핀은 이러한 과정철학적 사상에 근거하여 자연주의적 종교론을 주장하고 있다. 


과학주의적인 가치관이 주로 이루는 세계에 대한 가치관과 초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론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초자연주의는 실증할 수 없고 또한 세계 가운데 모순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지점에서 헤르만 바빙크처럼 기독교인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과학과 종교의 모순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화이트헤드의 교훈은 여전히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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