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는 공부하는데 한국 역사는 모른다는 비판에 큰 동감을 하면서 역사 관련 책을 조금씩이라도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효과도 미비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주, 계속해서 읽으면 좋아지겠지... 학창 시절부터 역사가 재미없는 점은 연도를 외워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이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한국 역사와 한국 교회사의 긴밀한 연관성은 충분히 공부할만한 주제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의 기본적인 틀 속에서 한국 교회사를 바라보는 것은 같은 사건에 대해서 진술하는 성격과 방향 그리고 교훈도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1. 한말 감리교회 역사 (1884~1910)
한국 교회사가 흥미로운 지점은 일반적인 선교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 선교사의 입국, 그리고 성서의 번역, 모임의 확장이라는 순서로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한국은 그 형태가 조금 상이하다. 중국에서 기독교가 우선 선교되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성서'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한국에서 문화적으로 인지되었다.
그런 점에서 성서가 한국사람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도록 독자적으로 번역된 글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성교전서"가 된다. 이때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미 이전에 한국의 구도자로 인하여 복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든 선교의 순서가 그렇지만 특히 근대시기에 있어서 선교는 곧 외교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듯이 역사적으로 종교는 사회를 통합하는 데 사용되었다. 종속변수로서 사회의 통합을 이끌어내는데 종교는 도움이 되었고 이는 곧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 형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에게 있어서 기독교 종교의 유입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인 나라를 의미한다면 자신의 나라에 대한 외부 정신의 유입이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종교의 역할이 사회를 통합한다는 점에서 정부의 외교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일반적인 나라와는 다소 달랐다.
가장 핵심적인 상황은 바로 여러 다른 강국에 의해 피폐해진 나라 상황과 더불어 한국 내부에 있었던 권력다툼으로 인한 소모전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외세에 대해서 배타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에 의해 흔히 말하는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평이 있다. 그런 점에서 선교사의 유입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고종의 허락하에 선교사는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종의 선교 윤허는 바로 "의료 혜택"이라는 지점에서 가능했다. 선교사가 단순히 와서 종교의 메세지만 가지고 온다면 당연히 막는 게 국가 안보차원에서 맞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첫 번째 썼던 선교전략은 바로 의료, 교육의 측면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에 있던 선교는 사실상 전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한 "간접 선교"라는 말이 더욱 맞다. 그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귀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굳이 감리교만이 아니다. 장로회도 이미 들어와 있었고 가톨릭도 있기는 했지만 예전 많은 억압으로 인한 순교로 인하여 그 교세는 잠깐 주춤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미감리교가 우선으로 들어오고 상황을 지켜본 남감리회가 뒤이어 들어왔다.
미감리회로서 들어온 사람은 유명한 '스크랜턴' 부부고 그 후에 상황을 지켜보며 들어온 남감리회 선교사는 '리드'다. 특히나 리드는 원래 중국에서 활동하려고 했던 인물이지만 한국에서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상황과 그 당시 세계 정서의 영향을 인하여 한국으로 우선 들어오게 된다.
초기 목적은 둘 다 동일했고, 한국에서 가능한 사역이 간접 선교였기 때문에 신학적 사상의 차이를 제쳐두고 서로 도와주면서 사역을 감당하다 이 둘은 후에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게 관계를 단절한다.
한국 첫 세례자는 "백홍준"이라는 인물이고 남성이다. 마찬가지로 첫 감리교 세례자는 "박중상"이며 남성이다. 그렇다면 여성 첫 세례자는 문득 궁금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항상 마음이 안타깝다. 첫 여성 세례자는 "최성균의 부인"으로 나온다. 물론 한국 역사책을 한 권을 보았고 다른 여성 역사를 기술하는 책을 보지 않았지만,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누구의 부인으로 기록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크랜턴 부인의 사역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었다. 특히나 교육은 여성에게는 마땅한 권리가 아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스크랜턴의 사역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또한 출세를 지향하는 남성 중심적으로 했던 반면 스크랜턴 부인은 시장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 없는 여인에게 향했다. 그 이유는 지식인이 선비라는 점에서 그의 부인에게 교육을 허락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부인에게 교육을 시키는 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여성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차별은 이름이 없는 '무명'의 역사이기에 기록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언급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 여성의 차별이 더 이상 없다는 말에 대해서 다시 고찰하게끔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2.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역사 (1910~1945)
사실 이 대목을 읽게 된다면 "교회사"라는 학문이 일반 "역사"와 다른 지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교회역사가 아닌 일반 한국사 교양서적이랑 함께 읽었는데 일제 강점기 속에서 한국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과 분위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각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감리교회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을 두둔하고 옹호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밝힌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을 가진다. 하나는 무력 통치이고 다른 하나는 3.1 운동에 의한 문화통치이다.
일제강점기 속에서 교회는 큰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나, 3.1 운동을 이끈 주도적인 인물이 종교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무래도 종교의 독립변수로서 사회에 영향을 준다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했던 역사이기에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제는 3.1 운동 이후에 전개된 문화통치시기다.
왜냐면 일제가 무력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같은 억압이지만 최소한 무력 통치 때보다는 억압의 형태나 방법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직접적으로, 육체적으로 타격을 주었던 경향에서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내부 분열을 이끈다는 점에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딱히 고통의 완화라던가, 억압이 줄었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은 이렇게 운동을 지도했던 지도자 급의 인물들이 친일활동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역사학으로서 한국사의 관점은 이 지점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안타까운 지점과 한계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광복을 위해 뭉쳐야 하는 민족들이 오히려 분열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감리교회사의 관점에서는 이 지점을 생각보다 온화한 입장으로 바라본다. 특히나 신사 참배에 있어서 감리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 지도자급의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신사 참배는 종교의 행위가 아니기에 해도 무방하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는 점에서 온화된 입장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인들을 지키기 위한 점에서 그와 동시에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교회를 옹호하고자 하는 맥락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동시에 같은 사건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이 상이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비슷한 선례는 하나 더 있다. 예를 들어서 갑신정변 이후에 개화파를 주장하 윤치호라는 인물과 스크랜턴, 리드의 사이에 대한 것이다. 아무래도 윤치호는 나라가 근대화를 돼간다는 입장에서 좀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스크랜턴은 미감리회로써, 리드는 남감리회로써 자신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두 교회가 건립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치호는 이 지점에 있어서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교파의 부흥을 위한다면 강력한 비판을 하나, 감리교회의 입장에서는 이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교파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지점에 있어서 좀 더 변명 아닌 변명을 그리고 합리적인 이유를 서술하는데 힘을 쓴다. 그러나 종교적인 색채를 지운 일반 학문으로서 한국사는 이 지점을 당파 간의 싸움으로 기록하거나 또는 삭제한다.
이후에도 나라에는 수많은 운동이 일어나고 민족주의적인 성격과 함께 기독교 신앙이 발달하게 된다. 마치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끈 하나님이 이제 대한민국의 하나님이 되어 구원의 역사로 이끈다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만 해도 감리교회는 미감리회, 남감리회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로 합쳐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분명 두 감리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어마무시하게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3. 해방 이후 감리교회 역사 (1945~2006)
해방 이후의 감리교회 역사는 사실상 흑역사의 길로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 좋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친일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개된 일본으로부터 시작된 교회 탄압은 이제 교회를 존속할 것인지 아니면 없앨 것인지 위기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감리교회가 "일본조선기독교회"로 변경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통치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과 통치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에 저항한 사람들은 목회자격을 잃거나 또는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그 지점에서 해방이 됨으로 생기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감리교회를 새롭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과 또는 있는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전자는 재건파, 후자는 복흥파로 구분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미감리회와 남감리회의 구분이 있었고 어찌어찌 통했다고 한다면 재건파와 복흥파로 구분되면서 한 번 더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동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와 안 그래도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구조와 구도를 갖춘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목소리 이 둘의 목소리는 분명 서로 의미가 있고 또한 이유가 있다.
재건파와 복흥파의 대립 구도로 인하여 사실상 가장 중요한 복원의 시기에 감리교는 흑역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싸우다 보니 진정한 감리교의 숙원이나 작업은 보이지 않고 또한 행하지도 않았다. 그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는 오로지 평신도의 몫이 되었다. 목사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평신도는 믿음을 지키기도 또한 믿음을 가지고 행하기도 참 애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리교는 언제나 분열의 역사를 가짐과 동시에 통합의 역사를 가진다. 재건파와 복흥파는 "무조건 통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시 한 번 통합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물론 시대적 요구와 상황이 이들을 합동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통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한국 역사에서 비극이라 말할 수 있는 6.25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반도는 분열되었고 그로 인하여 서울에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피난을 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 또 두 가지 의견이 생기게 된다.
서울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의견과 더불어 서울에 있는 평신도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서울을 사수하고자 하는 의견과 위험한 상황이기에 피난을 가서 전력을 가다듬자는 의견이다. 그로 인하여 교회는 두 가지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순교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아마 목회자 됨으로써 자신의 양들을 두고 떠나기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서울을 다시 수복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서울에 잔류하고자 하였던 '잔류파'와 피난을 갔던 '도강파'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분열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방적인 관계라고 말하는 게 맞을 수 있다. 왜냐하면 도강파에서 잔류파가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공산주의자와 결탁을 했다는 의심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잔류파 중에서 남아있었던 대다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선한 목자론'에 입각한 사람들이었다. 양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으니 그 자리를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이로 인하여 남아있는 목회자들이 북으로 이송되어 북한의 전력이 되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6.25 이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필두로 하여 정부가 수립되었다. 여기서 교회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화가 돼가는 것을 두려워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런 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자연스러운데 공산주의의 기반이 마르크스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는 종교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승만을 지지한 교회의 입장 표명으로 인하여 신앙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영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위르겐 몰트만의 말처럼 '정치 신학'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며 또한 신앙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 감리교는 한번 더 흑역사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권력다툼을 의미하는데 교회의 연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호헌파와 성화파, 정동파의 분열이라 말할 수 있는데 호헌파는 충정도 출신들의 결속을 다지며 생긴 서클이고 성화파는 평양에 설립되었던 성화신학교 교수와 학생 출신이 주로 이루었다.
처음에는 이 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다가 경기 연회를 주축으로 하는 서울과 경기, 인천 지역 출신자들이 결속을 다진 정동파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감리교는 이렇게 3개의 서클이 서로를 견제하고 권력을 다툼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권력 다툼 속에서 피해를 받는 자들은 언제나 평신도다. 그들은 자신의 서클에 스카우트할 목회자를 양성하고 탐을 냈으며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서클의 존속을 더욱 중요시 여겼다. 이 지점만 하더라도 감리교는 충분한 흑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감리교 100주년을 지난 이 시점에서 역사를 돌이켜 현재를 바라볼 수 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힘입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서로의 권력다툼을 위해 힘쓰고 있는가, 그런 지점이 언제나 인간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정치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계가 여전하다. 그러니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바르트의 말처럼 그것이 예수께 인도하는지, 그것이 예수를 가리키는지, 그것이 예수에 합당한 지를 분석하고 검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