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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05. 2020

인생은 정말 꽃보다 아름다울까

칼 야스퍼스, "비극론/인간론"

칼 야스퍼스, 비극론 / 인간론 / 현대의 이성과 반이성


비극론

야스퍼스의 책은 신기한게 정말 일정하다. 일정하다는 말은 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철학적 신앙을 통틀어서 모든 저서의 주제를 하나로 말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점들이 좋은 점은 일관된 진술을 한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상승한다는 것이지만 단점으로는 책을 읽어 나갈 수록 같은 말을 하니까 지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스퍼스의 비극론과 인간론은 전부 '인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 찾아보는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를 볼 수 있고 또한 그 가운데 인간의 현존재와 나아가야 하는 포괄자의 운동에 대한 개념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를 의미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관계에 대한 진술을 의미할 것이다.


야스퍼스의 비극론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인간 실존을 들여다 본다. 흔히 우리가 보는 문학작품은 인간의 비극적 삶을 잘 보여준다. 꼭 문학 작품이 아니더라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보여주는 것을 본다.


비극론에서는 오이디푸스와 햄릿을 예를 들고 있다. 이 둘의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극성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은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는 점을 안도하며 기뻐한다. 그 속에서 인간 실존은 참 모습을 찾아간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흔들리는 실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작품 중에서 '이태원 클라스'가 기억이 난다. 작품 캐릭터 중에서 있는 박새로이군은 정말 비극적 인생을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신의 편을 의지해서 자기를 찾고 삶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박새로이가 처한 상황, 또는 '장가'로 인하여 좌절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인생의 비극을 느낀다. 분명 한번쯤은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 까 여겼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복수를 위한 삶 속에서 그것을 이루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를 고민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야스퍼스가 비극론에서 주는 실존적 흔들림이다.


비극적인 것은 직관 앞에서는 현존재의, 곧 인간의 현존재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그것도 이러한 공포를 인간 존재의 포괄자에 바탕을 둔 분규에 있어서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의 직관은 그 자체를 통해서 비극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 곧 정화와 구원의 양식을 구체화한다.
- 칼 야스퍼스, "비극론/인간론" 중에서 - p.34


따라서 비극적 인생은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포괄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가에 휘감겨져있다는 느낌을 감각하게 하고 또한 그러한 운명으로부터 구원을 주기 위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인간론

야스퍼스의 인간론은 "인간이 무슨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를 중심으로 다룬다. 그것은 분명 인간이 현실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게하는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에 관한 것을 철학만의 영역이 아니다. 야스퍼스는 그것을 논증하기 위해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을 구성하고 있다. 사회학은 인간 공동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심리학은 인간 내면의 무의식에 관한 것을 말하고 인간학은 인간 존재 본질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실존주의 철학자 답게 실존철학에 대한 것을 따로 두고 말한다. 여기서의 차이점은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은 인간을 객체로 두고 보는 지식적인 차원이지만 실존철학은 그 자체라는 점이다.


'실존철학'은 모든 전문지식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사고방식이며 인간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 칼 야스퍼스, "비극론/인간론" 중에서 - p.158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비극적 인생에 있어서 흔들리는 실존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성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처럼 느껴지지만 포괄자로 인한 감싸안겨져 있다는 것을 동시에 느끼며 무제약적인 요청을 듣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은 무엇이 참된 '성공'인가를 의심한다. 세계 안에서의 성공은 여론의 동의의 양에 의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평가에 의해서, 뛰어난 지위의 획득에 의해서, 부자가 됨으로써 눈에 띄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에 나서는 자는 현존재적 조건의 확장을 위해 이러한 성공을 추구하겠지만, 그가 이와 같이 확장된 현존재적 조건을 지배하면서 이를 통해 충실한 생활의 상부구조로서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인간의 현실적인 현재가 될 때, 비로소 이 성공은 참된 성공이다.
- 칼 야스퍼스, "비극론/인간론" 중에서 - p.171


성공은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동의로서 성공이 정해지는 사회적 의미와는 다르게 실존적 성공은 자신의 현존재가 해방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존재에 대한 초점을 맞춰서 해석한 것이 발로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론에서 '소외'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존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각적인 방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야스퍼스는 인간 현존재가 처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현대의 이성과 반 이성을 보고자 한다.


야스퍼스는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반이성의 예로 들어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현대와 같은 과학 만능, 기술 만능의 시대에 있어서 이성은 무엇이며, 어떤 역학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은 사실은 과학의 미명 아래 과학을 왜곡시킨 '과학의 미신화'를 밝히고 나서,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과학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망상을 버리는 것이 과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설파한다.


즉 과학의 확실성은 인간 이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게 될 시 과학은 미신화를 이루게 된다. 과학의 미신화라는 것은 예를 들어 홈쇼핑에서 파는 옥장판을 과학적 검증을 거쳤다는 이유로 맹신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과학 이상의 것은 이성이다. 과학은 객관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은 평면적이며, 비역사적 지식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참된 인간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에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포함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은 과학 이상의 것으로서 역사와 만물의 근원을 끊임없이 해명하는 능력이다.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공정한 태도로 이러한 근원을 묻게하고 일러한 근원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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