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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Apr 21. 2020

흥미로운 복음서의 도입부 이야기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4편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도입부를 비교하는 책이다. 그런데 그게 꽤나 흥미롭고 재밌다. 나중에 교회청년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다.


마가복음은 극적인 열쇠로 보고 있다. 마가의 시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시작이라는 극적인 모습으로 시작한다. 극적이라는 것은 흔히 드라마에 사용되는 구조인데 그것이 복음서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저자가 주는 의도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지점은 마가가 독자를 상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운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좀 더 역동적이라는 걸 보여준다. 근데 성경 읽을 때 전혀 못느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극의 프롤로그를 '시작' 이라고 했듯이 마가도 "에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일종의 프롤로그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중에서 - p.25


마가가 다른 마태와 누가복음과 다른 지점은 성경을 인용하는 부분에 있다. 다른 복음서에선 '기록되었으되' 라는 언급이 있다. 그것은 예언된 일들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점인데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면서 바로 그 뒤에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 생뚱맞다고 생각하지만 마가에게 문학적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성취함으로써 예수가 오는 이유에 대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언의 열쇠로 보고 있다. 마가가 드라마적인 느낌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사용했다면 그로 인해 극적인 부분을 더욱 강조했다면 마태는 오히려 예언의 성취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것에 대해 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가복음이 우리가 극장에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해준다면, 마태복음은 우리가 학교에 되돌아온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해줍니다.
-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중에서 - p.51


따라서 마태복음은 오히려 교과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의 족보를 설명하는 장황한 글 뒤에 마태복음 3장에서부터 마가복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족보가 나온 다는 것이 마태복음이 예언의 열쇠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내려온 족보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에 예언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준다.


앞서 마가가 어떠한 일들에 성경인용을 굳이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마태는 그 정반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많은 부분에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정당하게 설명하기 위해 예언의 성취를 중심으로 논증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해 벌어진 모든 일이 구약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의 성취였음을 강조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중에서 - p.75


누가복음은 앞서 말한 마태와 마가와 어느정도 유사한 지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독 도입부만큼은 다른 특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누가가 다른 것과 다르게 도입부에서 자신의 신학적 사상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유독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항상 논증하는 것이 예수의 행동이 율법에 증거된 되로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수가 율법에 대해서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는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또는 의도했는지 안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율법을 폐기한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말은 넣지 않았다.


우리가 이 복음서의 이후 장들로 넘어가면 우리는 마태가 산상 수훈에서 전한 '반립 명제'뿐 아니라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장로들의 전통을 두고 벌어진 논쟁 이야기 또한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누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중에서 - p.103


마찬가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나서 백부장은 마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마가가 보기에 그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드러내주는 매우 중요한 신앙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에게 있어서 백부장의 고백은 그저 '죄없는 사람'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어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꾸준히 예수를 '의로운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 이유는 사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누가가 전하고 있는 대상은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는 점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언급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영광을 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서는 오히려 영적의 열쇠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신학적인 부분을 많이 담고 있다. 처음 시작을 '태초'라고 말하고 있는 지점이 그렇다. 마태는 족보를 통해서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에수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라 말하면서 구약에 예언된 것을 성취하고자 하며 누가는 어린시절과 율법의 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이어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서는 '태초에'라고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약의 창세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 지점을 통해서 요한은 신학적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는 영광의 열쇠라고 비유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나타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것이 바로 예수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도입부의 주제는 말씀, 곧 세상에 생명과 빛을 가져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 말씀하시는 것은 곧 행하시는 것이기에, 그분의 말씀이 말뿐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드러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 모나D. 후커, "복음의 시작" 중에서 - p.149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과 동일하게 그 말씀으로 존재하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이제 육신을 취하셨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복음서의 도입부를 이렇게 비교해가면서 읽는다는 것은 성경에 대해 흥미를 돋을 수도 있을 뿐더러 신학적으로도 참 중요한 키워드를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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