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패커는 서문에서부터 이 책에 대한 정의와 목적을 내리고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학술적 논문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국 제임스 패커라는 신학자의 신학적 정수를 담은 책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크게 3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 둘은 하나님을 보는 것, 셋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라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해명을 시작한다. 물론 신학에도 역사가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서술이 있었다.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하나 결국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구성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기본적인 주제는 결국 신학적 지식의 적용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아무래도 기독교 전통에서 말할 수 있는 것같다. 물론 교리다. 교리가 중요함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리 짱짱을 말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교리에 치우진 것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했는지 저자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리적 지식과 영적인 건강함을 함께 이루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리적 지식이 없이 영적 건강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교리적 지식이 있어도 영적 건강이 없을 수 있다는 말 역시 똑같이 옳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31
재미있는 것은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에 관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엇을 안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질문했다. 그리고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꼭 열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더 있는데 그건 귀찮아서 넘어가도록 한다. 궁금하면 아무튼 직접 찾아보는 걸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상징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77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는 것과 아신 것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 아무리 교리적 측면 또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아는 것과 믿음을 통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아신 바 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두가지의 증거를 전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때로 교회 안에서는 이질적인 형태가 있는데 삶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배운 바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신앙이 있지는 않은 형태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아는 것, 아신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인식의 차원에서 넘을 수 없는 벽과도 느껴질 수 있다. 아무튼 하나님 체험이라는 귀중한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믿음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서는 것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똑같은 실재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당혹함을 맛볼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126
신앙의 기본적인 틀이지만, 하나님을 보는 것의 전제는 바로 신앙이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자와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에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인식은 한계점이 많다. 물론 패커 역시 복음주의 계열에서 말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아래에서 시작하는 인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흔히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만큼, 약속을 묵상하고 그 약속에 기초하여 기도를 드리며 일상 생활에서 그 약속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믿음의 모험을 하는 습관을 빼앗아 갔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181
결국 하나님을 보는 것에 있어서 인간은 순종적이어야 하고 또한 겸손해야 한다. 특히나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다. 흔히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에게 속한 비공유적 속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welove가 부르는 찬양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속성 중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말의 의미는 결국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순종이라 말할 수 있다. 순종의 의미는 곧 고통에 관해서 하나님의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패커는 이 말을 책임회피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성실하게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아마 그가 성공회 소속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선하심을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이며 여기서의 순종은 고통을 이겨내는 열쇠가 된다. 그 순종은 오직 믿음으로 나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너무나 자주 어리석고 충동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으로 이끌듯이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 또한 마찬가지로,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가 종종 그런 것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성마르고, 도덕적으로 비열한 것이 결코 아니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239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자이다. 그러나 그 심판은 공의로우며 공정하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은 곧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을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관심의 방향은 사랑의 대상을 말하면 관심의 정도는 사랑의 크기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되게 정석적으로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의 피조물을 향해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패커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모순된 것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오해하는 하나님의 관한 판단은 사실상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이성적 한계가 있고 또한 교리적으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을 가톨릭에서 듣는다면 노발대발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말하자면 교리의 오류라고 말하기 보다는 잘못 적용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또한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 곧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인간이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설하고 그 본을 보여 주는 책으로 읽는다.
-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중에서 - p.404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회복시키신다. 고통으로부터, 상처로부터, 또는 헛된 영광으로부터 회복시키시며 그 가운데 자신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실현하신다. 패커가 주는 경건성과 그리고 신학적으로 성숙한 명료성은 분명 성도 가운데 또한 패커 자신이 가장 하고자 했던 하나님을 향한 학문적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