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문철 Jun 09. 2020

정말, 인지혁명 본좌 칸트센세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나름 성장했다고 한다면 성장한 것일까 불과 1~2년전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칸트 1차서적을 읽게 되었다. 근데 확실히 읽지 말라는 이유가 있다. 나도 어디가서 읽었다고 안해야겠다. 하지만 할거다.


책을 읽다보면 확실히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자의 계열에 속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갈릴레이-코페루니쿠스에 이은 자연과학에서의 계몽과 로크-루소-볼테르와 같인 교육, 사회, 정치이면에서 계몽을 담당한 사람이 있었다면, 철학의 중심이라는 형이상학에서 계몽을 이끈 사람은 칸트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은 백종현 교수의 번역으로 보았는데, 다소 햇갈리는 부분이 많다. 지금까지 선험적인 것으로 배웠지만 책 번역은 새롭게 초월적인 것으로 말하는 점이 있다. 선험적 감성에 있어서 그것을 초월적 감성학으로 번역했다는 지점이 있다. 


그니까 무슨 말이냐면 "아프리오리" 즉 경험보다 선행한다는 의미에서 선험적인 것이 여기선 초월적으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선험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여겨지는 선험을 근거한 초월론 즉, "트랜스덴탈리즘"은 초월론적으로 번역된다. 이 부분을 고려해서 읽어야 오해가 없다. 근데 난 오해함 깔깔 




1. 초월적 요소론 

1) 초월적 감성론 

초월적 요소에서는 크게 몇가지로 하위 개념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감성론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선험적 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험적 감성론이라는 것은 인식을 하는 주체가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물이 눈 앞에 있다"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어지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어떤 사물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이 공간에 의해서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현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식 주체는 사물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시간과 공간에 의해 선험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본다는 말이 조금 어패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순수 직관으로서 나타난다. 


공간과 시간은 그 방식의 순수형식들이고, 감각 일반은 그 질료이다. 전자를 우리는 오로지 선험적으로, 다시 말해 모든 현실적인 지각에 앞서서 인식하므로 그것을 순수 직관이라 일컫는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262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하는 것은 직관 중에서도 순수한 직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가 말했던 "물체는 연장한다"라는 분석판단의 개념이 칸트에게서 받아들여지고 또한 인식의 지점을 넘어서는 초월적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어서 공간과 시간은 감성의 대상이라는 직관의 기본 틀이고, 감성의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을 인지하는데 있어서 감성의 대상이라는 점을 말한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표상의 근원과 원천은 주관 자신,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표상 능력 자체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도 이 지점에서 칸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상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관적인 표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고 주관적인 표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대상 인식에서 감각을 통해 의식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현상의 재료가 된다. 현상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앞서 말한 "내 눈 앞에 있는 사물"을 인지한다는 그 표상이 그것을 바라보는 '현상'의 한 부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을 인지하는 것은 그것과 개념을 이어주는 것이 필요하며, 후반부에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상상력으로 말해진다. 


2) 초월적 논리학 

초월적 논리학은 흔히 순수 지성적 개념들에 대한 연역을 의미한다. 나도 배움이 부족하다보니 이 지점들이 선험적 지성을 의미하는건가 궁금하기는 한데 맞는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하고 아무튼 선험적이고 인지 이전에 주어진다는 점에서 이성의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논리학이라는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이 논리학은 우리 마음이 경험을 하는 기회에 주어지는 표상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다룬다. 선험적인 감성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현상하는 주관적인 인식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상하는 가를 파악하는 범주를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는 우리가 선험적으로 전제한다. 그니까 인지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사용한다는 느낌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나 종합적인 기능에 있어서 선험적 논리학은 "범주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내용으로 선험적 지성의 범주는 12가지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4가지 판단의 양태(? 맞는지 모름)으로 말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판단들의 양 > 전칭, 특칭, 단칭 

판단들의 질 > 긍정, 부정, 무한 

판단들의 관계 > 정언, 가언, 선언 

판단들의 양태 > 미정, 확정 명증 


이러한 범주 속에서 우리는 인지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책상에 사과가 놓여 있을 때 (이러한 명제를 가정했을 때 이미 사과가 있는 시간, 그리고 사과 존재하는 공간이 선험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게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 우리는 사과가 하나, 둘 또는 여러개를 파악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파악하며 그것은 선험적 지성의 12가지 범주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성이 없으면 우리는 개수를 구분하다는 것이나 양의 판단이나 질의 판단이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기도 이전에 이미 수의 개념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다는 점이다. 경험주의자라고 한다면 1이 '1'이기 위해서는 그것에 해당하는 경험이 필요하기에 수를 논증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제 이러한 경험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찾아 볼 수 있다. 


파생적인 지성개념들을 순수지성의 준술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개념들만 가지게 되면, 파생적이고 종속적인 개념들을 덧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고, 순수 지성의 계통도도 완전히 그려질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300

 

이러한 12가지 범주, 즉 양과 질, 관계, 양태의 준술어로 인하여 우리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물의 필연적 존재가 그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들어오는 인식의 양태를 감각하게 한다. 이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그 다음에 상상력과 이성을 통해 개념화를 하게 한다.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인 조건들인 것과 동시에 경험된 대상에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 대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그러그러하게 인식하는 한에서만 그러그러하게 규정된 대상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론은 곧 존재론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존재자란 현상뿐인 한에서, 그의 존재론은 "현상 존재론"이다. 그런데 요즘 읽고 있는 하이데거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는 이러한 지점에서 현상 존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론적인 입장에서 존재론을 다루고자 한다. 나중에 이야기 해봐야지 후후 




2. 초월적 변증학 

1) 초월적 가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사실상 크게 2장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초월적 요소론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 변증학이다. 앞서 초월적 요소론에서 초월적 감성론과 논리학을 다루면서 시간과 공간, 범주를 다뤘다면 후반에는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 능력과 연관되느냐를 다루고 있다. 


선험적 감성으로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선험적 지성으로서 12가지 범주가 있다.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선험적 상상력과 선험적 이성이 더 있다. 언젠가 칸트 2차서적을 다루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전제되는 선험적 능력은 선험적 감성, 선험적 지성, 선험적 상상력, 선험적 이성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앞서 선함적 감성과 지성을 다루면서 무엇을 인식하는 과정을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성과 무슨 연관을 가지는가? 하는 질문을 낳게 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초월적 변증학을 내세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감성적 직관의 조건들 없이도 순전히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의해서 표상한다면, 우리는 곧바로 하나의 주어진 조건적인 것에 대해 서로 종속하는 조건들의 전 계열이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633


변증학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책 제목 그대로 "이성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파악할 때 순수이성은 그것의 한계로 인하여 쉽게 초월의 부분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칸트는 이율배반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율배반이라는 것은 A도 맞고 B도 맞을 때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칸트에 의하면 "세계는 시간과 공간적으로도 한정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시간과 공간으로도 무한한다" 이러한 명제, 둘다 맞거나 둘다 틀린 경우르를 칸트는 이율배반이라 말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율배반은 4가지의 이율배반으로 나탄나다. 칸트가 주장하는 이율배반을 확인하면 지극히 솔직하고 또한 분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비판이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으로도 또한 과학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다. 


첫째 이율배반은 시간의 시초와 공간의 시초에 대해서 언급한다. 앞서 예시를 들었던 것이 첫째 이율배반인데 이것은 이성의 사유가 표상적으로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의 사유는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여 생각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이율배반 
정립 :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로 둘러싸여 있다.
반정립 :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한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640


두번째 이율배반은 환원주의와 독단주의에 대한 경계다. 흔히 말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이 예에에전에 말했던 지식의 대통합으로서 사회생물학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작은 것을 통해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성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칸트는 여기에 반정합을 더한다. 물론 칸트가 윌슨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시기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말도 안되기도 하고 깔깔 


둘째 이율배반 
정립 : 세계 내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있고, 어디에서나 단순한 것이거나 이것으로 합성된 것만이 실존한다. 
반정립 : 세계 내의 어떤 합성된 사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세계 내 어디에서도 단순한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648


세번째는 자유와 인과성에 대해서다. 칸트의 유명한 말에는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내 마음에는 도덕법칙이" 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연세계가 근본적으로 인과성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인데 그에 비해서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인 것에 비해서 자유는 원인을 두지 않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여기서 칸트는 필연적으로 이성과 도덕에 대한 연결성을 설명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셋째 이율배반 
정립 :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로부터 세계의 현상들이 모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거이 아니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 또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반정립 : 자유란 없다. 오히려 세계에서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 법칙들에 따라서 일어난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656


네번째를 통해서 칸트는 일부 사람에게는 무신론처럼 들릴 지 모르겠다. 그 유명한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칸트에 의해서 박살이 난다.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필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절대자의 존재는 순수이성의 한계로 드러난다. 즉 기독교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정립한 신의 존재는 사실 절대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이성의 한계로 인하여 정립된 이율배반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이율배반 
정립 : 세계에서 그것의 부분으로서든 그것의 원인으로서든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인 어떤 것이 있다. 
반정립 :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세계 안에든 세계 밖에든 어디에도 그것의 원인으로서 실존하지 않는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664


특히나 마지막 절대자에 대한 이율배반에 대해서 칸트는 조목조목 비판한다. 아퀴나스가 5가지를 통해서 신을 증명한 것처럼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물리신학적 증명의 관점에서 그것읠 불가능성을 확인한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전통적인 신의 존재를 비판했지만 그 자신이 신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와 도덕의 관점에서 신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은 실천이성비판에서 드러난다. 


2) 초월적 방법론 

칸트는 이제 이것을 종합하며 선험적 이성을 내세운다. 순수이성의 한계를 확인했을 때 우리는 선험적 감성과 선험적 지성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선험적 상상력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게 될 경우 앞서 본 것처럼 이율배반에 빠져서 이성을 활용하지 못하고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위에서 순수이성의 가상적인 이율배반을 다루긴 했지만, 그런 이율배반은 오해에서 기인했음이 드러났다. 즉 그 오해는 사람들이 일상의 선입겨녀에 따라 변상들을 사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나서, 이 방식 또는 저 방식에 따라 그것들의 종합의 절대적 완전성을 요구한 것으로서, 그런 일은 현상들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885


순수 이성을 통해서 우리는 교조적 방법 즉 교리적인 것에 제한되는 이성을 비판하게 된다.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신의 존재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통해 논증하려고 했던 지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험적 상상력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 결과다.


선험적 상상력은 선험적 감성과 선험적 지성을 선험적 이성과 연결해준다. 따라서 선험적 이성은 그것을 바탕으로 개념을 만들고 관념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책상 위에 있는 사과를 통해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그것의 양과 질, 양태, 판단이 있다는 것을 선험적 상상력을 통해서 '사과'라는 개념이나 진술, 또는 사과를 먹고나서 경험하는 '사과는 맛있다'라는 명제의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증명은 종합적이고 선험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그것들의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모종의 인식에 도달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916


이것은 선험적 이성의 역할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험적 이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선험적 주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순수이성비판에서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선험적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주체는 경험주의에서 말하는 경험의 그 자신으로서 주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에 근거한 주체는 그 자신, 즉 "자아" 자신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관념의 다발로 여겨진다. 그러나 칸트에 의해서 선험적 주체는 다시금 정립되고 있다. 왜냐하면 선험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선험적 이성을 가진 선험적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이전에 자아는 선험적으로 주어졌다는 칸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은 실천이성비판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준비한다. 왜냐하면 선험적 주체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자유의 영역에서 선험적 주체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만들기 때문이다. 자유를 가지고 있는 주체는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무릇 최고 목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므로, 현명하게 우리를 배려하는 자연의 최종 의도는 우리 이성의 설비에 있어서 본래 오로지 도덕적인 것을 향해 세워져 있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930


그렇다면 드는 의문은 윤리성과 행복이 무슨 연관이 있냐는 질문이다. 윤리를 지키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건 서로 아무 연관이 업성 보인다. 윤리성이란 윤리법칙이 요구하는 것이지만 행복은 우리의 행위와 별도로 자연의 인과법칙에 따라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우리의 모든 경향성들의 충족이다. 행복의 동인에서의 실천 법칙을 나는 실용적이라 부르고, "행복할 만한 품격 있음"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동인으로 갖지 않는 한의 실천 법칙은 그러나 도덕적이라고 부른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934


물론 간단하게 말하면 특히나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윤리성에 근거하여 살아갈 이유는 '심판'에 있다. 신학적으로 언급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하여 종말에 있어서 신의 심판이 우리에게 해당한다면 우리는 선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칸트에게 있어서 영혼이 불멸하기에,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선은 가벼운 점이 아니라, 그니까 "어차피 죽으면 걍 끝인데 무슨 도덕을 지키고 윤리를 지킬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다면 우리는 선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의 심판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소급한다. 즉 행복할 자격이 있는 자는 그가 행복해져도 좋다는 말이다. 그 행복한 자격은 실천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것을 보장해줄 신이 '요청'된다. 


이것이 순수 이성의 실천적 관심과 관련한 두 물음들 중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그것은 곧, 그에 의해 네가 행복할 만한 품격을 갖추게 되는 그것을 행하라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p.936


따라서 칸트는 자유에 근거하여 그와 동시에 내면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도덕신학을 정립하게 된다. 이것은 언젠가 실천이성비판을 다루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인지혁명 다음에는 도덕혁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