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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Jun 11. 2020

칸트ㅋㅋ디졌다...딱 대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우선 나는 철학전공이 아니다. 또한 하이데거를 따르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이데거를 많이 읽냐고? 이래서 실존 뽕이 무서운 법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전하고자 하는 사상들이 위대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역사적인 행보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자는 의견이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정초를 보고자 한다. 물론 칸트를 다루기에 선행적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기를 바란다. 물론 난 읽었으니까 깔깔 그와 동시에 하이데거는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를 읽을 것을 권고한다. 물론 책에서 그런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의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와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의 정초"를 비교하는 게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하이데거의 이 책은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말한 "존재와 시간"의 2부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시간을 요약하자면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물음과 시간성"이라고 말한다면 2부로서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현상학적 해체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존재와 시간의 해설서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흔히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평가한다. 그들은 존재자에 매몰되어서 존재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존재의 본질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를 잊고 있는 망각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칸트만큼은 형이상학의 정초,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칸트라는 사람 자체가 철학에서 새로운 전회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뭐랄까 너무 존재망각의 역사에서 구해내고자 하는 철학자가 많다. 하이데거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최애 철학자를 구해내려는 모습을 본다. 


오토 페겔러라는 사람은 자신의 저서인 "하이데거 사유의 길"에서 니체와 하이데거를 연결하면서 니체만큼은 존재망각의 역사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니체의 영혼회귀는 존재가 드러나는 지점 속에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오고 가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니체가 주장한 전통 기독교의 신을 부수고자 한 노력이 존재를 보고자 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카푸토라는 사람은 자신의 저서인 "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현상학의 방법을 아퀴나스와 연결하면서 아퀴나스만큼은 존재망각의 역사에서 구하고자 한다. 아퀴나스의 사유 방법이 하이데거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존재의 다가옴과 그로 인하여 은폐되었던 존재자의 존재가 탈은폐되는 구조가 아퀴나스가 주장한 엔쓰에 대한 에쎄의 다가옴이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존재자가 불안과 죽음을 통해 존재의 드러남을 경험하듯 엔쓰도 에쎄의 분여됨을 통해 존재 자체가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칸트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순수이성비판에 드러난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형이상학의 등장을 깊게 탐구하면서 발견한다. 그전까지 존재자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하고자 했던 철학의 역사가 칸트로 인하여 인식론으로 전회된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존재에 관심이 있고 존재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을 칸트가 실재와 현상을 구분하면서 현상 자체가 드러나는 인식의 문제라고 말했던 것과 연결한다. 그래서 칸트는 '존재자의 드러남의 가능 조건'을 담지한 철학자라고 말한다. 


아무튼 그가 말하기를 특수형이상학이든 일반형이상학이든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으로서 자리를 위해서는 "있는 것은 왜 있고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질문을 최소한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대답하고자 했다는 게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순수이성비판을 리뷰할 때 나왔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선험성의 원리는 결국 초월론으로 입각한다. 왜냐하면 선험적 감성과 지성이 상상력을 통해서 이성과 연합하여 개념을 낳는다는 점은 실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정초로서 칸트의 초월론을 가능 조건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전통에서 나타나는 '초월'은 왜 불가능하냐? 그것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율배반으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 망각이다. 하이데거는 칸트에게서 나타난 초월이 존재자가 대상을 드러낼 수 있는 '대상성'으로 인해 존재자의 존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자를 유한한 인식자에게 접근하게끔 하는  조건인 것과 동시에 존재자를 대상으로서 현상하게끔 조건을 지은다는 점에서 말할 수 있다. 즉 경험 일반의 조건은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가능 조건이다. 칸트 역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를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특히나 칸트에 대한 해석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일단 하이데거는 실존의 입장에서 말하고자 하지만 칸트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가받기를 하이데거가 칸트를 자신의 입맛대로 강업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존재와 시간에서도 칸트에 언급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특히나 이 책에서 존재론을 존재역사론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의 단초가 보인다. 하이데거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언어에 대한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있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의 2부가 나오지 못한 이유는 하이데거 자신이 인정하는 것처럼 칸트에 대한 해석의 한계를 맛보았기 때문이며 특히나 실천이성을 초월적 상상력의 지평에서 해석하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강압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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