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정, 은의 세계
적당한 내용과 적당한 분석 그리고 끄적임...
위수정의 소설 "은의 세계"는 단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보문고 E-book에서는 가끔 이벤트로 체험판 같이 무료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책이 체험판으로 풀렸기 때문에 감사히 감상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체험판이라 그런지 단편집에서도 "풍경과 사랑"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리뷰도 풍경과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풍경과 사랑'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쉽게 몰입한다면 할 수 있고, 좀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들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본 소설의 시점은 한 부인의 시각으로 시작한다.
남편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자신의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것으로 갈등은 시작된다.
아들의 친구는 유명한 배우의 아들로, 수많은 스캔들을 가지고 있던 유명한 사람의 아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들은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낳은 자식이 아니었고, 오히려 아버지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작은 탄식을 하게 된다.
그 탄식은 바로 사람들의 입소문에 대한 것이다. 수많은 추측들과 선을 넘어서는 소문의 내용들로 인하여 상처받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주수진"이라는 캐릭터다.
주인공은 자신이 사는 곳에 흔히 말하는 '맘 카페'처럼 단톡방에 소속되어 있다. 그 단톡방의 존재 이유는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는 것에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랑을 한다거나,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눈다거나, 누군가를 뒷담 화하는 것이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지만 함께 참여하고 싶지는 않아하는 주인공은 지속해서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주수진과 연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니 마지막 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답장을 하고선 소설이 끝나게 된다.
물론 주수진이라는 캐릭터는 소설의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인물의 아들이 더 핵심적인 캐릭터가 되는데, 주인공은 그 아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그렇게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마지막 모습은 술 취한 여자의 통화를 엿듣는 것으로 소설은 마치게 된다. 그것은 여자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조바심이다. 결국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방황해하는 주인공에 특별한 해결책이 없이 끝나게 된다.
내가 아니라 내 뒤의 허공을 바라보며.
- 주수진, "은의 세계 '풍경과 사랑'" 중에서 -
결국, 그것은 허공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한 표현은 사실상 성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하다.
남편과의 감정적인 교류의 부재, 물론 부부간의 관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속에서도 서로의 야성을 깨운다는 표현은 분명히 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그것은 상호적이진 않다.
오히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주인공이 남편을 다른 대상으로 상상해서야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상호성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 까...
남편과 나는 거의 한 달 만에 함께 누웠다.
나는 금방 달아올랐지만 그건 남편의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 주수진, "은의 세계 '풍경과 사랑'" 중에서 -
이런 표현과 더불어 자그막하게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 사랑의 대상이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문제는 영호를 향한 감정이라는데... 과연 이런 형태의 분위기를 독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 '로리타'와 같이 연상 남녀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도 있다. 그럼 이런 영화는 가능하고 이런 문학은 가능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다. 결론은 가능하다. 문학적 의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능하다.
문학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학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역사적으로 기본으로 여겨졌던 남성중심적인 로맨스에 대해서 뒤바뀔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더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순간 나는 남편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어졌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나중의 일 따위는 어찌 되건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나 할 말이 있는데, 내가 있잖아...
- 주수진, "은의 세계 '풍경과 사랑'" 중에서 -
아마 표현의 이유는 이 부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공유될 수 없는 마음, 그리고 가족 구성원 간의 감정 부재에 대한 해소일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그러한 공허함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문학을 통해서 전체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제언이라는 것은 안다.
몇 년 전 스카이 캐슬이 유행한 적이 있다.
스카이 캐슬을 통해서 작가가 의도한 바는 과도한 입시 경쟁에서 학생들의 비인간화를 경계하자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성의 회복이 우선이라는 말도 되겠다.
근데 오히려 방송이 낳은 문제는 스카이 캐슬이 주고자 했던 주된 문제가 결을 같이 한다.
입시 경쟁의 과열을 문제로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들이 오히려 실제로 입시 경쟁을 가져와 버렸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의도한 바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이유는 알겠으나,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올 가능성에 대해서다.
남편이 있는 부인이 유명 셀럽의 아들에게 연심을 품는다.
그리고 정확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성적 관계를 상상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이 묘사에 대한 의미가 어떤 건지는 독자들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해석과 제안을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물론 다양한 의견이 있을 테니 이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말이 된다.
문학은 불편해야 함은 맞다.
그리고 문학으로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한다.
다만 이 소설을 1차원적으로 읽을 경우에 생길 오해에 대해서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