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이것저것 첨가해서 리뷰해보는 데미안
데미안은 정말 많이 읽는 책이다.
어디 독서모임을 가더라도 빠지지 않고 읽는 책이 바로 데미안이다.
이상하게 인기가 많다.
아니면 그만큼 유명하니까 그런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데미안은 처음으로, 첫 번째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작가가 몇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헤르만 헤세랑 밀란 쿤데라다.
밀란 쿤데라도 문장이 진짜 어려운 걸로 유명한데, 헤르만 헤세도 좀 어렵긴 하다.
근데 다행인 건 쿤데라는 거의 모든 소설이 그런 반면에 헤세는 다른 건 좀 읽힌다.
어쩌면 내 개인의 독해력이 형편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설 데미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은 작품 해설에 있는, 즉 평론가가 전문적으로 분석한 게 아닌 개인의 생각이므로 정확하지 않다.
하나는 내면의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경험이다.
내면의 성장은 곧 세계의 확장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지속해서 세계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의 확장이라는 것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기존의 세계관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의 확장은 자신의 세계를 부수는 것이다.
그 말은 세계가 직면한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며, 자신의 단순한 가치관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를 설명하는 차원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게 크래머와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를 '신, 도덕, 교회, 신앙'과 같은 개념으로 다뤄왔다.
자신의 세계를 앞서 말한 개념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세계'로 깊숙이 박혀 들어가, 저 아래로 떨어져 가라앉고 있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세계가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폭력이고, 어두운 세계이며, 또한 현실이다.
아무튼 데미안이 해결해주기는 하지만 크래머가 부모님한테 자신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협박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싱클레어는 도덕심, 신의 인도로 크래머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행동에 신의 의도가 있다면 자신이 아는 신과 모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예배 시간에는 구원받고 회개한 사람으로서 감사함이 넘치는 마음을 담아 내가 좋아하던 옛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이런 일들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그런 점에서 어두운 세계의 경험은 싱클레어로 하여금 "자신의 세계에 대한 한계"를 의미한다.
독일의 철학작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점에서 '세계 정위'를 언급한다.
언제나 실존으로서 한 개인은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했으며, 이제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고 있다.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요구로서 해명의 요청이 포괄자의 운동으로 보고 있는데,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세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싱클레어는 일종의 "계몽"된 상태로 이전에는 의문시하지 않던 것들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런 질문은 '전통적 해석'을 향해 들어간다.
즉, 카인의 이야기가 예수 옆의 도둑들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정답처럼 여겨져 온 상식들의 틀을 깨고자 한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언제나 '책임'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다.
내면에서 자신만의 법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어려워.
사람은 각자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해.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싱클레어는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서 자신으로 옮기고 있다.
그것은 더 자유로워지는 만큼 더욱 무기력해진다.
이전에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게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싱클레어는 자유로워졌지만, 그만큼 더욱 무기력해졌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기 벅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일종의 마취제다.
물론 멘토이면서도, 계몽자이면서도, 때로는 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해석의 차이랄까
아브락사스라는 말을 통해서, 싱클레어에게 어두운 세계, 아까 나뉘었던 싱클레어의 세계가 합일이 되도록 안내해주고 있다. 그 상징이 아마도 베아트리체인 듯하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보기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는 이성적인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브락사스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의 일종이긴 한데, 그 특징은 세계의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서 영적인, 그리고 영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의미로 헤세가 영지주의적 개념을 차용했다고 보지는 않고, 오히려 신비주의적 합일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영지주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제 싱클레어가 자신의 세계와 자신이 외면했던 세계를 둘 다 돌아보면서 성장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데미안이 재미있는 지점은 바로 외부의 경험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제약적인 요청이다. 자신의 한계를 바라는 것이 실존의 의미라면, 이것은 우주의 개념이다.
세계의 요청이다. 그런 점에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과의 소통을 요구하는 요청이다. 이러한 요청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신의 계시로 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멘토의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생길 수도 있다.
언제나 세계는 안과 밖으로 향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가 자신의 안으로 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단일"에 가깝다. 매우 축소되는 것이다. 반대로 세계가 밖으로만 향하면 세계는 무한하다. 무한의 의미는 결국 '공'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칼 야스퍼스라는 철학자는 무제약적 요청을 이러한 지점에서 세계로 향하는 의지로 말한다.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그 존재 자체가 세계의 요청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질문을 주고 의미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답을 요구하는 것이 진정한 멘토라고 여길 때가 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을 찾는 것은 언제나 싱클레어였고, 그는 질문만 하고 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요청'이라는 표현을 썼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직면한 세계의 한계 속에서 드러나는 요청은 언제나 두리뭉실한 의미를 해석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경계선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달아 가는 자들이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때로는 데미안과 같은 사람이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향을 짙게 받을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의 데미안일 수 있다.
그러나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데미안은 언제다 답을 주지 않는다.
데미안 같은 사람이 답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데미안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설명해야 하며 책임져야 한다.
내 삶을 결정짓는 것, 내면의 나, 나의 운명, 나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
싱클레어가 마지막에 데미안과 자신을 겹쳐본 것처럼,
내 삶을 사는 사람은 데미안과 자신을 겹쳐볼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독서모임을 했을 때 앞서 말한 것처럼 내부와 외부로 평가가 갈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꽤 강렬한 경험이어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있다.
사람은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인데, 데미안도 자신의 그런 성향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네는 내성적인 사람이라서,
읽고 나서 "내 안의 데미안"을 찾는데 집중한 반면에
어떤 외향적인 사람은 "내 주변의 데미안 같은 사람"을 찾는데 애썼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는지 자신의 주변 지인을 일주일 동안 약속 몇 개씩이나 잡으면서 만났다는 사실을 듣기도 했다.
그게 내성적인 나로서는 되게 신기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내 주변의 데미안을 찾는 것도 중요한 거 같다. 아무튼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적든 많든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사실 이미 리뷰가 내 생각을 더해서 말했기 때문에 더 덜할 건 없다.
그래도 데미안을 벌써 한 3번인가 4번째 보는 거 같은데, 이제야 내용을 조금 알 거 같다.
처음 읽을 때는 진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몰라서, 예전에 리뷰를 보니까
"대충 사람들이 읽고 나서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어 그거 좋았어'라고 대답하는 것 같다."라고 적어뒀더라.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그냥 좋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제 이런 느낌으로 읽었다고 말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