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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Feb 09. 2022

신앙공동체란 무엇인가?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성도의 교제와, 성도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01. 역시 본회퍼 센세

역시 본회퍼 센세...책 읽으면서 감동받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이런 책은 함께 읽고 토론하고 발표를 해야 하는데...


아쉽다. 학교 다닐 때 이런 책을 좀 더 빨리 접했더라면, 교회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것에서도, 교회를 왜 다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그 당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가진 교회론은 무척이나 건강하다.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그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었다.

직접적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방관한 것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립은 강자의 편'이라는 말이 대충 맞는지도 모른다.


본회퍼는 이제 '고백교회'로서 진정한 신앙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했다면,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삶이 그리스도인인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선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닐 뿐, 그 삶이 어떤 삶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그렇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사회인이라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다.

다만 어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부분에서만 좀 더 깨끗한 사람이라 여길뿐이다.

물론 요즘은 그러지도 않지만,

솔직히 교회를 다닌다면서 더 못되고, 나쁜 사람도 많긴 하니까




02. 하나님과 인간 사이, 성도의 교제

본회퍼 센세가 말하는 성도의 교제는 단순한 친목이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 한 가지에 근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교제 안에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단순히 친목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교회를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냥 외출한 거랑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죄로 인한 불화가 있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도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없다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불화가 있을 뿐입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


실제로 굳이 신앙을 집어넣지 않아도,

인간의 불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는 것처럼, 인간이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은 곧 갈등을 직면한다는 말이기에 결국 갈등 상황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그런 불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통해서 교제한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립보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이라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본회퍼의 말처럼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서로 나누기 위해 모인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교제 가운데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예수 없이 성도의 교제는 불가능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의 기준이 세워지게 된다.


즉, 우리의 교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지를 파악하면 된다.

물론 모든 순간에서 예수가 있을 순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를 바라야겠지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성도의 교제는 다른 교제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03. 인간과 인간 사이, 성도의 공동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 교제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성도의 공동체는 지극히 교회 안에서의 현실이 된다. 

따라서 본회퍼가 말하는 성도의 공동체는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할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인간적인 현실이 아닌, 영적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정신적 실재가 아닌 영적 실재입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성도 공동체는 성도의 성화를 걷는 길이다.

성화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색하지 않은 단어다.

믿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믿는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성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아는 것이고, 그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 오해되는 부분은 성화의 개인적인 사유다.

믿음은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화도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회퍼는 여기서 성도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성화는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마라톤 선수 옆에서 페이스를 같이 맞추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신앙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것이 더욱 성화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는 결국 인간은 알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물론 이 말이 공동체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도의 교회 공동체는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기도하는 것, 찬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의 순간에 하나님이 오시고 또한 기도와 찬양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이다.

기도는 시편에 근거하며 또한 성경은 하나이며 전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로써 인정하게 만든다.


이 말은 결국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섬김과 봉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곤경과 시험에 빠진 그리스도인 형제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서 -


특히나 본회퍼는 공동체에서 개인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둘 다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 상호적이기 때문에 한쪽을 우선 할 수도 없고 저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혼자 있을 수 없다면, 공동체에 많은 부분을 의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앙은 결국 신 앞에 선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자신의 신앙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의지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신 앞에 선 단독자는 공동체와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개인을 지워서는 안 된다. 

공동체에서 개인이 사라지는 경향, 즉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언제나 항상 도사리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언제나 개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개인으로 인해 공동체는 살아 있고,

그 공동체 안에 개인은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의 가장 큰 중요한 지점이다.




04.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

요즘은 모든 기준은 상대적이다.

하나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 속에서 기준을 세우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물론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는 성경적 가치관이 필요하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주장한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물론 본회퍼는 독일의 신학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서있는 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고백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피해야 할 것이다.

자기 합리화를 피한 채, 오직 예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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