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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r 01. 2022

너무 좋은 아렌트 입문서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악과 책임, 책임과 정치, 정치와 세계, 세계와 정신, 정신과 국가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01. 생각보다 읽기 쉬운 책이다

한나 아렌트는 어려운데, 이 책은 그래도 좀 쉽다.

생각보다 초보자를 위해 썼다는 생각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친절하다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책이 얇다 일석이조 아닌가


내가 한나 아렌트를 접하게 된 것은 꽤 최근에 일이다.

물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꽤 예전에 읽었긴 했지만, 그냥 감상에 그쳤지 그렇게 크게 와닿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한나 아렌트가 야스퍼스의 제자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에 내가 하이데거, 야스퍼스를 읽고 사상을 깊게 고민해보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야스퍼스를 통해서 한나 아렌트를 보게 되었고,

다시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주는 사상이 내 생각에는 오늘날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꽤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그런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입문할 수 있도록 많은 내용을 쉽게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적인 건 저자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꼭 읽으라고 독려하는 부분이다.

또 좋은 점은 각 챕터 뒤에 항상 어떤 책을 참고로 하면 좋을지 소개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발췌 독서라고 하나? 보는 책에 인용된 책으로 다음 독서를 정하는 방법? 정확한 명칭은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좋은 책들을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질문을 남겨주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저서와 다른 저서를 충분히 인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신의 삶,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혁명론, 공화국의 위기, 칸트 정치철학의 이해 등등 많은 저서의 핵심 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근데 결국 그 말은 무엇이냐면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다는 말이다.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누가 이런 주장을 했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에, 그가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그 기원은 무엇이고 원리는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본래 저자의 책을 읽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나는 겨우 3권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입문서도 어쩌면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뭐 나중에 좀 더 직접 읽어보면 되겠지.




02. 악의 평범성과 책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에서 너무나도 많은 개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본인이 직접 봐야 한다.

그리고 본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이해하게 된다.

결국 새로운 이해를 불러오는 것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튼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개념을 말한다.

그것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나중에 독일어로 보게 된다면 너무 감격에 벅찰 듯하다.


아무튼 악의 평범성은 악을 행하는 자가 특별할 정도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나쁜 자는 원래 나쁜 것이다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누가 봐도 인격적이고 선해 보이는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악의 평범성은 그냥 무색무취의 사람이 악을 저지른다는 말이 아니고, 그리고 누구나 악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말이 어쩌면 진짜 나쁜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들에게 죄책감을 줄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바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사유의 불가능성'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사유의 불가능성은 타인의 상황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함을 말한다. 

어쩌면 오늘날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공감능력이라 말할 수 있다. 공감인 오늘날은 어쩌면 감성적인 영역이라고 여겨지고 있는데, 오히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공감능력을 사유의 능력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따라서 남을 위해 울어주고, 남을 위해 나서고, 남을 위해 또는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감성은 바로 사유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사유의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능력이 부재되는 이유는 전체주의적인 강압과 시간적 개념의 부재가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박사학위를 어거스틴의 사랑의 개념에 대해서 썼는데 아마 여기서 어거스틴의 시간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 근데 그거까지 쓰면 너무 길어지는데, 아무튼 한 줄로 말하면 어거스틴은 시간에 대해서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시간으로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정신적 시간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진 않은 것 같은데 아마 마음의 시간이라 말했던 것 같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를 일에 대한 미래의 결과를 사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을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미래에 대한 사유를 결여했고 그로 인하여 사유 불가능성을 남겼다.


악의 평범성으로 인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책임에 대한 문제를 낳게 된다.

아이히만에게 책임은 있는가? 유대인에게 책임은 있는가? 독일 민족에게 책임은 있는가? 세계 시민에게는 책임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와 야스퍼스의 관점 차이가 꽤나 흥미롭다.

이것도 말하려면 엄청 걸리니까 한 줄로만 말해야겠다. 야스퍼스는 다양한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범죄, 정치적 죄, 형이상학적 죄, 도덕적 죄인데 앞서 말한 사람들은 각각의 죄가 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도, 세계시민에게도, 독일 시민에게도 죄는 있다고 말한다.


근데 죄라고 하면 너무 종교적 맥락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주로 책임으로 말한다.

물론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야스퍼스의 정치적 책임이 결국 아무런 행동을 낳게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한나 아렌트도 비슷한 결을 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적 책임이라는 개념에다가 행동을 추가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03. 책임과 정치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의 책이 정말로 재미있는 점은 각 책들의 주제가 조금씩 연결된다는 점이다.

마블 세계관에서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이 조금씩 이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각 다른 영화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등장하는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책도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조금씩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은 책임과 정치라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연결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독일 시민들의 책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주의 사고 속에서 자신을 경계하지 못한 것과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사고는 인간에게 도덕적 판단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전체주의의 유령이 짙게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전체주의의 기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인간화이며, 다른 하나는 몰사유화이다. 

이 안에서는 개인은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다.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마치 그것을 추구해야 비로소 인간성이 완성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적인 것에 대해서는 법적 인격, 도덕적 인격, 개성을 없애는 것으로 나온다.

오늘날에 일반인이 법적인 인격을 잃지는 않으니까 다행이지만 도덕적인 것과 개성은 너무나 쉽게 잃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이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겠지만 말이다. 국가가 시민의 도덕적인 것과 개성을 뺏어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구조적인 문제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개성의 파괴는 결국 자발성의 파괴로 이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얼마나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어렵고 단지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를 원하고 있다.

편안하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게 제일 좋은 삶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피곤해한다. 결국 자신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개성을 발휘하더라도 그것이 경제적인 풍족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무가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굳이 추천해주지 않을 일이다.


인간 역사에서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었지만 그만큼 큰 실패를 낳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제 자본주의 속에서 도사리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주의의 요소는 꼭 공산국가, 독재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도 전체주의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라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해서 보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아는 전체주의는 독재적이고 공산주의에서 주로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부품이 되어 비인간화를 낳는다.

너무나도 유명한 말처럼 쉬는 것도 일의 일종이다라는 말처럼 인간은 쉬는 것에서도 해방되지 못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유는 인간의 비인간화를 가져온다.


인간으로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가치로서, 노동의 가치로서 여겨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동의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인간은 몰사유화를 하게 된다. 더 이상 사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 답지 않게 살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경제의 부분을 무시할 수 없지만 경제만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킬 책임이 시민들에게 있다. 그것을 경계하고 자신의 개성을 지키는 것에 정치적인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04. 정치와 삶 "인간의 조건"

앞서 말한 것처럼 정치와 삶은 연관이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면서 정치는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나, 경제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경제만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면 이익 속에서 가려지는 비인간화 몰사유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을 잉여적 존재로 여길 사람들에게 어떤 노동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노동, 작업, 행위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 하는 질문은 사실 야스퍼스의 사유에 가깝다.

그것을 야스퍼스는 세계 정위로 불렀는데,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차용하여 3가지 개념으로 확장한다.


하나는 노동이다. 인간은 어찌어찌 결국 노동해야 산다.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연명해 나가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은 노동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는데, 야스퍼스도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결국 희생을 통해서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한계를 명확하게 느낀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먹고살려고 일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이다.


둘은 작업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취미를 곁들이게 된다.

노동이 아니라 작업으로써 정위 되는 세계는 좀 더 의미가 있는 삶을 말한다.

취미활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단순히 노동하는 삶에서 조금은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야스퍼스 철학 2에서는 실존 조명을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단계가 실존 조명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생물학적인 영위를 위한 세계에서 이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찾기 위한 물음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권태를 낳지만 작업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공장에 들어가서 단순 반복하는 것은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도 생각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지만

작업은 건축가가 도면을 그리고 건물을 지으면 끝이 나는 것처럼 명확하다.


셋은 행위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천하고자 한다.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형이상학을 의미한다. 더 초월적인 것을 파악하는 그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이 개입된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행위란 생존의 욕구로 이루어진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에 따라서 그리고 실존적인 욕구와 함께  살아가야 하면서 그 책임을 자신의 행동으로 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야스퍼스는 이 단계를 철학 3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와 야스퍼스가 이렇게 세계관을 공유? 하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물론 야스퍼스는 실존주의적인 관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아렌트가 비판한 적도 있다.


이렇게 한나 아렌트는 이제 정치와 삶을 연결하면서 시민으로는 어떤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질문을 남기고 있다. 사실 이제 여기서 삶과 정신이라는 주제로 "정신의 삶"을 말해야 하지만 내가 그걸 읽기를 않아서 그리고 너무 많이 써서 쓰기 귀찮다.


또 사실은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한나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적용한다. 판단력 비판은 미적 판단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취미 판단이라는 특성을 정치적으로 엮어 설명한다. 아주 탁월하다.


또 하나 더 사실은 공화국의 위기에 대해서다 칸트의 정치철학 이해를 통해서 공화국 아니다 이제 그만해야지




05. 오늘날에 한나 아렌트를 읽는다는 것은...

한나 아렌트를 오늘날에 읽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전체주의의 사고를 피해 가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으며,

또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민의 정치적 책임을 놓지 않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환멸 나는 정치 세계에 있어서 마지막 손을 놓지 않게 해주는 듯하다.


한나 아렌트는 언제나 정치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전체주의적 사고’를 경계한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초래한 인간의 도구화, 또는 사유의 불능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소한 오늘날 노동하는 우리가 그리고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실존의 사유 없이는 ‘행위’ 할 수 없음을 통해서 책임 있는 삶과 더불어 ‘상식’으로 여겨진 모든 전체주의적 사고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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