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결혼을 관하여 / 결혼을 말하다
결혼 포기 세대속에서 성경적으로 결혼 파고들기
호불호 갈림 주의
우선 말하자면 나는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좋아하지 않다고 말하면 왠지 부정적인 것 같으니까, 읽기는 읽는데 그렇게 달갑게 읽지는 않는다.
너무 정석이라고 해야 할까? 정석적인 대답은 나쁜 게 아닌데 좋게 말하면 정답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답 회피라고 느껴 저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고통에 답하다, 하나님을 말하다, 예수, 내가 만든 신과 같이 팀 켈러의 많은 저서 중 몇 안 되는 책을 읽어봤다.
몇 안 되는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바는 팀 켈러 목사님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자본의 냄새가 짙게 있는 거 같다. (이건 나의 주관적인 견해니까 정말로 안 그러시고 대단한 목사님이다)
자본을 마냥 찬양하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적 관점에서 결혼관이 얼마나 자본 적이냐를 지적하시기 때문에 자본에 대한 경계를 갖추시고 계시지만, 결국 그 뿌리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아무튼 이번 책은 결혼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결혼에 관하여라는 책을 먼저 읽었고 그 후에 결혼을 말하다를 읽게 되었다.
사실 결혼을 말하다 라는 책을 다른 사람이 흥미롭게 읽고 리뷰한 거를 봤었기 때문에 읽어보고자 했는데, 그 책이 아니라 결혼에 관하여라는 책을 먼저 보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그 책인 줄 알았지...
결혼을 말하다가 조금 별로면 결혼에 관하여는 더 별로다...
결혼에 관하여라는 책은 결혼을 말하다 라는 책 보다 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하게 말하고 있다.
물론 두 책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제시하는 과정을 비슷하다.
오늘날 현대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자본을 중심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뿌리가 주고받는 것이기에 결혼에 대해서도 서로가 주고받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말은 꼭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여기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결혼이란 현실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두 가정이 만나는 것이니 서로 조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투자하고 사고팔아 수익을 남긴다는 시장 논리가 결혼을 비롯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들어왔다.
- 팀 켈러, "결혼에 관하여" 중에서 -
사실 이러한 자본 논리가 우리의 삶에 녹아 들어왔다는 것은 반대할 수 없이 지명한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도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사랑 자체가 소유되는 지점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성경에 나타나는 결혼에 대한 의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행위가 결국 배우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은 제도적으로도 묶이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자신의 실존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결고 고독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배우자를 우상으로 섬기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꼭 배우자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너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바라볼 때에만 당신은 이 땅에서의 남편이나 아내를 잘 사랑할 수 있다.
- 팀 켈러, "결혼에 관하여" 중에서 -
그런 점에서 결혼을 바라보는 성서적 해석은 단순히 제도적, 사랑의 결실이라는 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장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실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을 통해서 남녀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정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로 국제로 뻗어 나갈 수 있다. 그러한 힘인 그리스도에게는 존재한다. 따라서 가정은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거나 상대방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팀 켈러 저서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연애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뭐 팀 켈러 목사님도 이미 기혼자이니 결혼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었겠지만, 사랑만 가지고 결혼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말이나, 사랑의 유통기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더불어 인생을 함께 그려나가는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정이란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나가는 가운데
차츰 깊어가는 '하나 됨'을 가리킨다.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중에서 -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더불어 우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과 더불어 부모형제, 친구 간의 사랑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우정은 무엇인가?
나 나름의 해석으로는 이제 인간성과 같은 면모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우정은 단순히 동성 간의 모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선생과 제자 간에도 피처럼 강인한 인연이 쌓여있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우정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가는 공동체로서 작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랑과 우정은 결국 큰 차이가 없을 수 있으나, 사랑에는 우정이 있어야 하고 또한 우정에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팀 켈러 목사님이 고수하고 있는 복음주의적 시각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 로맨스는 들어갈 수 없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당연히 들어갈 수 있으나, 동성에게는 무리다.
그렇기에 결혼이라는 것은, 또한 마찬가지로 연애라는 것은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성적인 파트너, 또는 재정적인 동반자를 얻는다는 개념으로 결혼한 이들은 진정으로 한마음이 되어 한 길을 갈 수 없다.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중에서 -
헤르만 바빙크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계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물질 만능주의도 이제 빛바랜 의미가 되지 않았는가
결혼과 더불어 이것저것 포기하는 세대가 생겼다는 말은 그만큼 삶에 있어서 자본의 영향이 더욱 커졌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세상을 구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단지 교회를 다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세상적인 요구와 신앙관까지 더해지니 그리스도인은 더욱 결혼하기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팀 켈러 목사님의 아주 강점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 답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을 눈 가리고 아웅 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을 만날 필요는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은 종교인이 아닐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무교인이 본인으로 하여금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꼭 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가했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같은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같은 종교를 만나는 것도 좋다고 본다. 그래야 그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결혼을 비롯해 연애까지 결국 사랑만이 아니라 우정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함께 동행하는 게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충격적인 것은 성 역할과 성 결정권에 대해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팀 켈러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대항으로 나온 담론에 대해서 다시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대항하고자 했던 담론의 관점이 사실상 어긋난 것, 그리고 새로운 대안으로 이렇게 하면 더욱 건강하고 올바를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환논리에 가깝다. 새로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결국은 예전에 있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이러한 성 역할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세상이 요구한다고 해도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저 전통만을 추구하며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팀 켈러 목사님은 결국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강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성은 항상 주체가 될 수 없고 섬기는 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물론 팀 켈러 목사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나온 문제에 대해서 변증을 하고 있다.
그것은 남성이 리더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여성에게 차별을 하는 리더가 아닌 섬기는 리더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에서 문제의 해결처럼 느낄지 모르나 결국 결론은 여성은 남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며, 남성은 리더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리더해야 하는 것이며 여성은 그런 요청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에게 순종하고 그 성 역할에 따르는 것을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또 다른 발돋움이 필요했다.
이른바 '섬기는 리더' 이야기다.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중에서 -
따라서 성 결정권도 자신에게 없다. 분명 자유로운 성적 결정권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자유의 남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한 사랑과 건강한 연애를 위한다면 그리고 연인 간의 사랑을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팀 켈러 목사님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성적 결정을 가능하게 하며, 여성은 종속되고 남성은 대표자가 된다. 물론 팀 켈러 목사님이 이 말을 다시 들으면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고 말할 거 같다. 결국 '섬기는 리더', '강한 조력자'라는 뜻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녀로서, 우리가 이전까지 여겨온 모든 차별들이 사라진 상태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말은 결국 다시 옛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성적 결정권도, 성 역할이라는 틀도 필요 없다. 그저 그리스도만 필요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