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문철 Mar 24. 2022

역시 김초엽, 믿고 봐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본 리뷰는 "당당뉴스"에 기재된 칼럼임을 밝힙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몫은 무엇일까?






01. 아픔의 존재를 기억하기

   아픈 경험은 정말로 힘들다. 고통이라고 불리는 이 감각은 육체적인 부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작용된다. 특히나 고통에 대한 현상학적인 주장으로 바라본다면 육체적인 고통은 순간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은 지속적이다. 물론 상처가 나면 아픈 것도 계속되겠지만, 아픈 감각은 단발적이다.


   정신적 고통은 지속되기 때문에 절망이라는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기억은 절망을 도출하며, 절망에 끊임없이 머물게 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망각의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김초엽의 이번 소설은 첫 장편소설이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 이후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더스트’라는 식물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지면서 세상은 크게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러한 사건 ‘이후’를 그리고 있다. 근데 독특한 점은 끊임없이 기억을 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세상은 하나의 큰 사건으로 인하여 변하게 되었다. 이타적인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고 오로지 이기적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생존자들인 만든 곳이 바로 ‘프림빌리지’라는 곳이다. 이곳은 상징적인 곳이면서도 동시에 멸시를 받는 곳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이기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근본적인 혐오는 ‘모순’으로 가득차있다. 누구보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비인간성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프림빌리지는 일종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쩌면 르네 지라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고통과 피해에 대한 생존이라는 몫을 가지고 폭력을 감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정당성을 얻는다.


   이렇게 고통은 기억과 동시에 망각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고통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분명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잊고 싶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것만이 아픔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고통의 순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선택’이 될 것이다. 고통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어떤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본인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생기는 문제는 선택은 곧 정치적인 이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고통을 기억하고, 그 고통을 기억하기로 선택하는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야 우리가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다.


   김초엽 작가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음적으로 결혼을 말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