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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r 31. 2022

믿음은 의심인가 확신인가?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신 

계시에 의해서 믿음의 확신은 가능하며,
믿음의 확신은 신앙의 기초다.


01. 오랜만에 읽는 바빙크 

학교를 다닐 적에 나는 나름대로 헤르만 바빙크를 꾸준히 읽었다. 

물론 바빙크의 저서가 너무 많은 탓에 성실하게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유명한 책은 잘 읽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바빙크의 계시 철학과 기독교 세계관 개혁교의학 개요를 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물론 그의 신학적 주장을 얼마나 동의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실하고 신실한 믿음은 놀랄만 하다. 


특히나 나는 저자의 주요 가치를 그가 말하는 것과 삶의 일치를 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주장과 산앙이 그가 말하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일치를 추구했다. 

그런 점에서 바빙크는 나에게 있어서 좋은 모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말로만 신학을 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오랜만에 읽어보는 바빙크의 책이다. 

그 이름도 '믿음의 확신'이다. 예전에 논문을 준비하면서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도 그리스인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논증하였는데, 결국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온다고 한다. 


복음주의 계열의 신비한 점은, 사실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주의이지 복음주의라고 하기엔 아무튼, 많은 신학자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다는 점이다. 다양함을 강조하는 분파와는 다르게 서로 일치하는 모습이 복음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이 곧 진실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듯 하다. 




02. 믿음은 의심인가에 대하여 

공부를 하다보면 의심이 드는 순간이 꽤 있다. 

성경의 형성 과정이라던가, 교회 역사라던가 아무튼 이것저것 공부하다보면 신학도 인문학이고, 인문학중 철학이 말싸움이다 라는 비판을 받는 점에서, 신학도 비슷한 비판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각 교단과 교파가 나누어지는 이유도 역시 어떤 주제에 대한 상이한 의견과 정치적인 이유가 많이 있었기에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이 올바른 것인지 전통적인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필요하다. 데카르트가 자신을 혐오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사유가 진실한 지를 파악하고자 의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에서도 의심은 건강한 질문에 속한다. 

맹목적인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을 낳는 지 역사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분별을 위해서 신앙에 관한 사유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흔히 말하기를 자유주의 신학은 의심에 강점을 두었지만 목적을 잃었다고 비판 받는다. 

의심과 불신앙은 다른 것이지만 자칫 의심은 불신앙을 불러온다. 

또한 의심으로 인하여 신앙의 신비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헤르만 바빙크도 이런 지점에서 믿음의 의심도 어느정도 역할이 잇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 




03. 믿음은 확신이가에 대하여 

헤르만 바빙크는 믿음의 확신이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초가 된다는 말은 신앙에 있어서 시작이 되고 또한 마지막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시작부터 확신을 동반하고 포함한다.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신" 중에서 -


믿음의 확신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이다. 

신기하게도 복음주의 계열 학자들은 이러한 '확신'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서 존 스토트도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믿음의 확신에 대해서 강조한다. 


이들이 그토록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믿음에서 모든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의 원천에 대한 확신은 매우 중요하다. 

존 스토트 같은 경우는 앞서 말한 책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확신이 생긴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헤르만 바빙크도 확신은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계시로 인하여 확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종교가 확신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계시가 우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시 신적인 계시의 권위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증명의 차원에서 벗어난다. 

확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련의 체험들을 한 후에야 얻어진다.
확신은 흔히 특별 계시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기계적으로 전해진다.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신" 중에서 - 


계시는 종교의 전제이고, 토대이며, 또한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계시에 근거한 믿음은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 위치를 가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다른 것에 비해 유일무이하다. 어쩌면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우선으로 여겨진 절대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는 유일무이한 성격을 지닌다.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신" 중에서 -


물론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너무 배타적인 절대성을 추구하는게 아니냐 물어볼 수 있다.

뭐 작은 견해로써 개혁신학의 특징은 이러한 강한 주장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정도는 가볍게 애교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바빙크가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절대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반대 급부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빙크가 주장한 것이 아니다. 결코 바빙크는 아마 타 종교에 대한 구원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오히려 다른 것에 대한 말을 삼가함으로써 가능성은 남겨놓았다는 점이다. 

아무튼 계시는 확신을 가져오는데 그 확신은 경험에 의해서 알게된다. 

알게 된다는 말은 인식한다는 말이지 증명한다거나, 파악한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만 오류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는 증명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계시는 학문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계시는 무엇인가? 헤르만 바빙크의 "계시 철학"에서는 계시에 의한 종교성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결국 종교나 세계 인식, 즉 인간이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한계에 대한 극복을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에서도 헤르만 바빙크가 강조하고 있는 계시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계시의 참됨은 오직 양심과 마음과 의지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계시는 실천적으로 경험해야 하고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의 확신" 중에서 -


아무튼 헤르만 바빙크는 믿음의 의심보다는 믿음의 확신이 신앙에 더욱 좋은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믿음의 확신은 인간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계시에 근거를 둔 믿음의 확신은 신앙생활을 더욱 윤기있게 만들어주고, 또한 신앙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면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충분히 녹아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맹목적인 믿음의 확신은 경계해야 한다. 

그 부분에서 믿음의 의심은 언제나 필요하다. 

물론 헤르만 바빙크가 맹목적인 믿음의 확신을 가지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니 안심하시길 




04. 둘 다 필요한 신앙의 오묘함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원래 참 오묘하다. 

모순이라고 말한다면 그럴 수 있는데 애초에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니 그것부터 모순이 아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준과 명칭에 대한 정의를 해야하는게 당연한데, 정작 정의를 하면 그것은 이미 원래 의도와 가깝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허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의심과 확신은 모순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하나 틀리지 않고 맞지 않다는 오묘함이 존재한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가 아닐까? 


이러한 모순에 처하는 기독교 신학을 보고 있으면 헤딩 슈뢰어가 "개신교신학연구입문"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사회학은 사회라는 대상이 존재하고, 문학은 글이라는 대상이 존재하고, 과학은 자연이라는 대상이 존재하기에 그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지만 신학은 대상이 하나님이기에 결국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상과 목표가 벌써 오묘해진 기독교 신학은 무엇 하나가 공식 설정으로 정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신앙을 공유하기 위해서, 더욱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 노력하는게 아닐까 싶다. 




01. Gibt es Gewissheit in religiösen Dingen?

Ich habe ein Buch gelesen. 

Das Buch ist "De zekerheid des geloofs".


Man fragt sich mitunter Glauben.  "Was ist Glauben?"

Wie kann man von echtem Glauben erfüllt sien.

Herman Bavinck hat sagt. "keine Frage des Glaubens"


Das ist Gewissheit. 

Wie ist möglich Gewissheit?

Die Gewissheit ist durch die Offenbarung möglich.

Also man hat die Glauben, was Jesus´s Leben und Glauben angeht.

Und die Glaube wird sich möglich von Jesus´s Kreuz und Auferstehung die Gewissheit machen gelassen


Es gibt Gewissheit in religiösen D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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