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역사적으로도 빨간 책은 몸에 좋다
니체를 안좋아하는데 읽는 이유는 사실 없다. 그냥 책이 거기 있길래 읽었을 뿐.
사실 이것저것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워듣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철학자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분위기지만 유독 니체만은 한마디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왜 그런지 너무 궁금했다. 사실 나는 니체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게 읽지도 않는 편이라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왜 그렇게 독서모임을 가면 니체를 읽는 사람이 많은건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매해서 보기로 했다.
특이하게도 다른 철학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니체에 대해서 이야기만 나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려워서 우선 읽지 말고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부터 보라는 첨언들이 많이 나오길래 직접 보기로 결정 한 것이다.
니체 정도면 그래도 입문하기 쉬운 철학자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왜 철학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니체를 좋아하는 건지 이 책 안에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다. 다들 추천한다면 그만큼 이유가 있거나 영향을 받아서겠지.
독일어로 Jenseits라는 단어가 저편, 저쪽이라는 단어인데 무엇의 저쪽이냐면 von Gut und Böse, 즉 선과 악의 저편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 직관적인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선과 악의 저편에는 도데체 무엇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선악을 구분 짓던 도덕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우선 말해야 한다. 니체는 스스로 이 책을 "위험한 책"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칸트에 의해서 세워진 도덕법칙을 그야말로 이성적인 것이 아닌 아주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힘에 대한 열망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무엇이냐면 칸트에 의해 도덕은 선험적인 것이다. 이러한 도덕법칙은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즉, 도덕을 알 수 있다는 '앎'에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품격성으로서의 '삶'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것을 전복시킨다. 그의 사유에서는 도덕이라는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이 기준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상태다. 따라서 저 너머 Jenseits로 향한다면 선악의 저편에는 오히려 힘의 의지가 있고 이것은 '삶'을 말한다.
우리의 삶에는 '힘에의 의지'가 온통 도사리고 있다. 남을 질투하는 이유, 더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력,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별할 정도로 덕을 가지고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힘에 대한 갈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현대인들이 더욱 권력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권력이 있는 자들이 실제로 자신의 권력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가 이러하다.
대중문화를 보게 된다면 니체의 말이 더욱 이해간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 많은 문화매체들이 권력에 대해 다루는 것을 자주 확인한다. 그리고 권력의 추구와 그것이 지나쳐서 망하게 되는 루트, 어쩌면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도 다수 존재한다. 아무튼 이 내용에 대해서 하고싶은 말은 칸트의 '앎'에서 '삶'은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라는 '삶'에서 '앎'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힘에의 의지는 긍정되고 누군가는 좌절된다. 권력을 가지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나머지는 실제로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지 못하고 좌절해버린 자들은 자신의 좌절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권력에 대한 반항으로 합리화 한다.
어쩌면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지만 (물론 선악의 저편이 저 책의 주석서와도 같은 개념이니까 당연하지만) 기독교의 가장 큰 오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니체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를 긍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좌절을 오히려 순교나 신앙을 통해서 해결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노예와도 같다. 따라서 그것은 노예의 도덕이 된다. 자신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를 억누르고 합리화 하는 것을 전체적인 진리로 여긴다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은 결국 유용성이다. 노예의 도덕은 '악인'이 공포를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할 수 있는 자가 공포를 불러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인의 도덕은 이와 다르다. 자기자신의 의지가 자신이 될 수 있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로 살아가고 그것인 '선인'이다.
따라서 도덕은 재정의된다. 기독교 전통에 따라 유용성의 입장에서 진리로 여기던 것을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도덕을 품을 수 있는 자가 새롭게 도덕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칸트 처럼 '앎'에 의한 '삶'이 아니라 '삶'에 의한 '앎'이다.
니체는 더 나아가 3개의 논문을 통해서 도덕의 계보를 찾는다. 말그대로 계보학은 그 원인을 찾는 것이므로 앞서 말했던 선악의 저편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다. 도덕의 계보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도덕이론의 시작을 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의 자연발생이다.
도덕이론은 앞서 말했던 칸트 중심적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의 자연발생학은 도덕을 이성적 사유의 결과로 보는게 아니라 삶의 의지로 인해 형성되고 발생된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니체는 재미있는 지점을 말한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당연히 핍박하는 자는 선이고 핍박하는 자는 악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악이고 하나님께 있는 자는 선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좋음'과 '나쁨'으로 해석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함은 강력함이고 마찬가지로 비열함은 무력함을 나타낸다. 진실로 선과 악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의미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사유에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보기 좋았다는 것과 하나님이 보기 나빴더라는 말이 지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선과 악, 즉 도덕을 좋음과 나쁨으로 해석하게 될 때 우리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 된다. 비이기적이고 평범한 것을 선으로, 이기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악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니체에게 있어서 이런 가치는 유대인들의 원한 감정에 의한 것으로 판단한다.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논리의 철저성 때문이다.
그는 계속 삶에 의한 의지를 주장하는데 마찬가지고 선과 악을 좋음과 나쁨으로 해석하게 된 가치 전환을 유대인의 원한감정으로 해석하면서 그들의 민족적인 의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니체는 이제 '죄'와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 역시 도덕을 의미할 때 중요한 키워드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결국 '죄'를 이야기하게 되고 칸트의 이야기 처럼 우리 안에 언제나 양심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일어 schulden은 '죄를 짓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와 동시에 '빚을 지다'라는 의미를 지난다. 마찬가지로 die Schuld는 '죄'라는 의미와 동시에 '채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니체는 한 가지를 고찰한다. 바로 죄는 채무다.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을 이러한 의미에서 죄라는 단어를 신에 대한 채무로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는 '채권자'인 신에 대한 종교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죄와 의무라는 개념을 도덕화하여 이것을 양심의 가책으로 되돌리면서 도덕의 자연발생을 역전시킨 것이다.
죄의 문제와 책임의 문제를 채무의 문제로 해석한다면 자연스럽게 도덕에 관한 것은 선험적이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역사적인 과정에 따라서 채무를 다하고자 했던 즉 의무를 담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점차 형성되면서 함께 만들어진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그 원인을 찾아 올라가는 계보학의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