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정치신학
예외상태에서 결정은 곧 독재의 필요성을 말한다
칼 슈미트가 말하는 정치는 무엇이기에 왜 정치철학이 아니고 왜 정치신학일까? 이런 기본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읽게 되었다. 물론 슈미트의 책을 한 두권 정도 읽어봤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것을 철학이 아닌 신학으로 풀어낸다는 점은 여전히 신박했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세계의 상황이 안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독일은 더 심했을 테니까 아무튼 그런 점에서 슈미트의 정치적, 철학적 사상은 독일의 시대적 응답이고자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다시 읽어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결국 정해져있는 역사의 결과론적 비판을 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다시 재고찰하고자 한다.
사실 주권이라는 것은 오늘날 의미가 정해져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이 '주권'이라는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따라서 이 주권은 국민이고 국가란 국민이라는 말에 대해서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 근본은 역시 민주주의, 자본주의, 의회주의가 결합되어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근데 이제 이 책의 재미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칼 슈미트는 특히아 의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도 비판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 칼 슈미트, "정치신학" 중에서 -
주권자는 결국 예외상태를 결정하는자다. 국민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라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그것을 권위로 결정할 수 있는 자다. 그렇다면 예외상태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슈미트에 의하면 예외상태는 단순히 일종의 긴급명령이나 계엄상태 따위가 아니다. 예외상태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법학적인 일반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급명령이나 계엄은 오히려 법 아래에 있기 때문에 예외상태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예외상태란 무엇인가? 결국 말하자면 규범의 내용이나 법적 의미로 도출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규범은 결코 예외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결정도 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권이 국민일 경우에는 이러한 예외상태를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말 그대로 국민이 해야 한다. 하지만 국민은 그럴 수 없다. 칼 슈미트가 보기에 국민은 그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알고 있는 것처럼 루소를 더불어 로크와 같은 철학자들이 절대개념을 일반의지로 해석한 바 있다. 그것이야 말로 국가가 국민의 의지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예외상태의 상황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다. 다만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그 사건을 처리하고 다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 체계를 준비하는 것 밖에 없다.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 칼 슈미트, "정치신학" 중에서 -
그렇다고 해서 예외상태 아무런 질서 없고 무정부적인 상태를 말하는건 아니다. 주권자가 예외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모든 규범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화고 고유화다.
슈미트가 생각하기에 모든 법은 결국 '상황에 따른 법'이다. 법이 생기는 과정을 지켜본다면 어떤 상황이 생기고 그 상황을 규정할 법이 없다면 입법을 거쳐 공표가 된다. 상황이 생기기 전에 우선 법이 있을 수는 없는가? 상황을 먼저 예방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인가? 아쉽게도 일반적인 규범은 생활환경이 정상적인 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예외상태는 이러한 일상적인 상황과 정상적인 형태를 벗어난다.
혼란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 따위는 없다. 법질서가 유의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질서가 구축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정상적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하며, 주권자란 바로 이 정상적 상태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다. 따라서 모든 법은 '상황에 따른 법'이다.
주권자는 상황을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만들어 내고 보장한다. 그는 이 최종적 결정의 독점자이다.
- 칼 슈미트, "정치신학" 중에서 -
칼 슈미트가 결정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바로 주권 개념에 인격적인 것을 제거하자는 것에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루소에 이어진 일반의지의 개념은 국가의 주권이 인격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영국의 경험과 대륙의 이성을 합친 노력을 했던 칸트에게 있어서 국가 개념은 필시 도덕적이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서 선험적 주체가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국가도 이러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만 슈미트는 이러한 인격적 개념을 국가 개념에 지우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결정을 요구한 듯하다.
결정이 독자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결정의 주체가 그 내용과 함께 독자적 명료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법적 삶이라는 현실에서 중요한 점은 누가 결정하느냐이다.
- 칼 슈미트, "정치신학" 중에서 -
이제 칼 슈미트가 말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들이 왜 신학이라 불리는 지 자연스럽게 의문점이 남는다.
슈미트는 아무래도 정치적 표상들이 어느정도 신학적이라 여긴 듯한데, 아마 그것이 국가론에 필요한 개념들이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라 여기기 때문인 듯 하다.
전능의 신이 만능의 입법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러 개념이 신학에서 국가론으로 옮겨 갔다는 역사적 발견을 봤을 때만이 아니라, 이들 개념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체계적 구조를 봤을 때도 그렇다.
- 칼 슈미트, "정치신학" 중에서 -
재미있는 지점은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기적이 대체로 위에서 아래,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것, 초자연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예외상태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예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내용을 지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예외상태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이신론적인 경향, 즉 기적을 세계에서부터 추방시키고 기적 개념 속에 내포된 자연법칙의 중단을 의미하는 듯하다. 따라서 두개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유비적 개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루소의 일반의지는 주권자의 의지와 동일시 된다. 다만 이 의지는 결국 인민의 의지다. 인민이 주권자가 된다. 문제는 슈미트가 생각하기에 인민이 언제나 올바른 의지를 가진다는 필연성과 인격적 주권자의 명령을 특징짓던 올바름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예외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는 주권자는 단순히 일반의지로서 국민이 아니고 또한 인민의 선한 선택도 아니다. 따라서 독재는 요청된다. 국가의 중대한 상황과 아무런 법 규범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예외상태에서 결정에 대한 엄격함은 의회의 대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의 울림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