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문철 May 27. 2023

인류학에 초월의 맥락은 없는가?

유발하라리, 사피엔스

사실 사피엔스는 초월에 대해 관심 없지 않을까?

1. 확실히 인기가 많은 유발하라리  

유발하라리, 뭐 유명하니까 말 다했다.

사람들이 신학을 읽지는 않아도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읽으니 그의 선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책은 읽기도 쉽고 내용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간결하니까 베스트 셀러이든 스터디 셀러이든 올라갈 이유가 충분하기는 하다.


독서모임을 가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사피엔스를 읽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생각에 많은 부분 동의하는 것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책이라고 소개하는 분도 어느 덧 있다.

그정도로 오늘날의 인문학적 영향력 중에 유발하라리가 주는 것은 꽤나 많다.


아무래도 그가 주는 탁월함은 인류학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맥락과 과학적 사유를 결합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어느정도 이해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길정도로 해석이 탄탄하니까 인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보다 호모데우스를 먼저 본 타입이다.

포스트휴먼과 관련해서 호모데우스를 읽었던 적이 있어서 사피엔스의 내용을 어느정도 알아두고는 있었다. 사실 호모데우스의 절반 내용이 사피엔스의 내용 요약이라서 딱히 읽을 필요성을 못 느낀 것도 있다.


아무튼 사피엔스를 결국 읽어보니까 호모데우스에서 유발하라리가 주장하고자 했던 내용들이 그제서야 이해가 된 느낌도 없잖아 있다. 결국 많은 지성인들이 유발하라리에게 사상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시대라는게 절실히 느껴진다.




2. 상상 속의 실재라는 단어에 대하여

사피엔스에서 중요한 단어는 결국 '상상력' 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에 비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신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상력은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것을 실재한다고 믿는 믿음을 말미암아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이 특별할 정도의 상상력,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공유하여 연대할 수 있는 힘, 유일하게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가능했다. 다른 유인원이나 종들은 혈연을 돕는 것에 멈추는 경우가 많다. 자기와 같은 핏줄일 경우에는 돕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지만 전혀 연관이 없는 타인을 돕고 위한 다는 것은 자연 생태계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아무튼 유발하라리는 이러한 상상 속의 실재라는 단어를 통해서 인간이 발달, 발전할 수 있었던 4가지 혁명을 설명한다. 신기하게 역사적 발전에 관해서 서술하기 보다는 오히려 앞서 말했던 인간이 가진 상상력이라는 단어가 4가지 혁명을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서술한다. 아마 이 지점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있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상력이 첫번째로 작용한 혁명은 바로 인지혁명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종에 비해서 다르게 '인지'하고 생각했다.

인지는 결국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바로 '언어'다. 사피엔스는 다른 종에 비해서 언어를 더욱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소통을 더욱 가능하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빠르게 성정할 수 있었다.


두번째로 작용한 혁명은 바로 농업혁명이다.

이것은 마치 주객전도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밀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지만 오히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는 사실이다. 밀은 인간으로 인하여 자기 종을 탁월하게 보존하고 널리 퍼트리고 있다. 뭐 밀 생산량을 말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밀이 존재하고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지점을 들여다 봤을 때 인간에게 작용한 상상력은 우리가 농업을 통해서 주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지능이 없어보이는 작물 들이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인간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도전이고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그다지 자존심 상해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세번째로 작용한 것은 바로 돈이라는 개념의 혁명이다.

이 돈은 인류를 통합한다. 종교도 하지 못한 것을 돈이 가능하게 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다.

저번에 하비 콕스의 신이된 시장이라는 책을 본적이 있는데, 유발하라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어느정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물론 전자는 이제 경제학을 신학의 영역으로 치부한 것이고 후자는 인간학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 같다. 근데 왜 전자는 그렇게 각광받지 못하고 후자는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가?


마지막으로 과학혁명이 있다.

아마 유발하라리는 이 챕터 과학혁명을 연구하면서 호모데우스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것 같다.

과학에 대해서 많은 긍정을 하면서 더 나아가 인간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더욱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작용된 상상력은 바로 진보라는 이상이다.


과학을 통해서 세상이 발전하리라 라는 생각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 즉 과학이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본이다. 과학은 필연적으로 자본과 함께 해야 한다. 뭐 당연한 것이 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구윤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가치화 될 수 없는 과학은 인정받을 수 없다. 많은 돈을 들여서 연구했더니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다면 무엇을 위하여 돈을 투자하겠는가, 돈이 결국 돈을 불러온다는 자본주의 논리는 자연스럽게도 과학혁명에 대해서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4가지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은 상상 속에 있는 실재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다고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인지한 게 아니라 만들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이라 말 할 수 있겠다.




3. 읽다보니 입맛에 맞는 부분만 동의하는 나의 내로남불

유발하라리, 이번 책을 읽어보니까 많은 부분 동의하고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유명해질 수 밖에 없는 통찰력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뭐 내가 인정안한다고 그가 유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 인정하고 말고냐 라고 할 수 있긴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니까 진짜 웃긴게 내가 얼마나 내로남불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 알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해야 좋아하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주장을 하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발하라리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가 상상력에 근거한다는 말은 그렇게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어보면 이와 비슷한 주장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역시도 인간이 종교라는 공동체를 형성함에 따라서 더 살아남기 쉬웠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종교를 상상력으로 치환한 유발하라리와 굉장하게 유사한 주장이다. 어쩌면 그것이랑 똑같다고 해도 될 거 같다. 그가 정확하게 언급은 하지 않지만 결국 인류학자라면 진화생물학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근데 문제는 이제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나타나는 환원주의다. 결국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상상력 또는 상상 속의 실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게 뭐 잘못도 아니고 그렇다고 설득력이 없는 말도 아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굉장히 환원주의적 태도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따라서 유발하라리의 약점은 이러한 환원주의적 태도로 나타난다. 상상 속의 실재로 두루뭉실하게 용어로 설명한다면 모든 지 그에 맞추어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 그는 신용, 종교, 국가, 인지의 부분에서 상상력의 영향력을 설명하고 있지만 같은 논리로는 더 확장하여 윤리, 연대, 공동체까지 상상 속의 실재로 환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단순히 자손번식의 방법으로만 이야기 한다면 많은 독자들은 특히나 유물론적인 형이하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자손번식의 방법론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다양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들과 의미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단순히 자손번식의 방법을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지만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 의미나 내용이 특히나 인간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종교도 이에 해당한다. 종교를 인간의 상상력을 가지고 만들어 낸 산물, 특히나 호모 사피엔스가 더욱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인도해준 상상 속의 실재로 이해할 수 있으나, 많은 인문학적 생각이나 신학적 내용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원주의의 위험성이 여기서 나오는데, 신학이 과학과 대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기법이 어느 신학적 사상과 잘 맞는 과학적 철학을 꺼낸다는 것이다. 폴 킹혼 이라는 작가가 이에 해당하는데 그가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학안에서도 교리적 차이로 인하여 다양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대화 가능한 신학만 종교 전체로 또는 신학 전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발하라리는 자신의 이론이 종교와 대화 가능한 또는 설명 가능한 수준에서 종교를 파악하고 있다. 그외 다른 종교학적인 서술이나 신학적 서술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것을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왜냐면 사람은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를 한 해석으로 환원하여 이해한다는 것이 썩 동의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근데 문제는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인 신용도 상상력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공감했다는 것이다. 나의 내로남불

이것은 왜 나에게 있어서 가능한가?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신용도 상상력에 근거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상상력은 종교적 경험이라는 것, 마찬가지로 하비 콕스의 예시처럼 그런 신용이 오늘날 종교가 되었다는 점 이 세가지가 어울려져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하고 마찬가지로 에른스트 블로흐도 자본주의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할 때 또한 유발하라리도 자본주의 핵심을 이루는 신용이 상상력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그 상상력이 종교에도 근거한다 할 때 종교가 여전히 아편과 같이 작용한다면 신용도 아편처럼 작용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는 심하도록 부정적인 반면 왜 여전히 자본주의와 신용은 유일한 답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아무튼 결국 유발하라리의 초월적 사유에 대한 부재는 결국 호모데우스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이유가 없지... 다만 그 포스트휴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가 보고자 하는 내용이 얼마나 탈인간중심적인 (특히나 호모 사피엔스의 종에 대해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필연적으로 초월적 사유는 전제되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권은 결정하는 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