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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Jul 15. 2024

윤리학의 기초에 관한 개인적 단상

판넨베르크, 윤리학의 기초 


1. 윤리학의 기초에 관한 개인적 단상 

   종교와 윤리는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관계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탈종교화, 무종교화 되어가는 시기에 종교가 주는 유익함은 어쩔 수 없이 윤리와 도덕에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상 종교의 역사 속에서 행하여진 많은 일로 인하여 종교가 도덕을 잃어버린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기초를 묻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종교와 윤리의 괴리 속에서 종교는 언제나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질문에 관한 신학의 대답은 틸리히의 신학적 쟁점이기는 하지만 사회와 일반 학문 혹은 상식과 신학의 내용이 서로 괴리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판넨베르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교회를 지을 돈으로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게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인 형태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행하는 비도덕적인 모습들이 종교인이라 할 수 없기에 종교는 윤리와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이 질문을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결국 윤리학의 기초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니체의 비판 이후에 도덕과 윤리는 확실히 호, 불호의 의미로 나뉜 것 같다. 확실히 삶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명확한 선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윤리를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윤리학의 기초는 단순히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상식과 기독교 신학은 배치되는가? 판넨베르크는 그런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학이 보여주는 삶의 양식에 집중한다.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본다면 기독교 윤리는 결국 신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학적 인간론을 의미할 것이다. 판넨베르트의 신학적 방법론이 결국 보편성을 담지하는 계시라고 한다면 신학적 인간론의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는 결국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게 된다. 


   기본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남으로써 나타난다. 즉,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가만히 두시는 것이 아닌 많은 관심을 가지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아중심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통해서 탈중심성으로 나아간다. 


   윤리학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간이 삶에 주어진 질문을 찾는 과정이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부분이다. 판넨베르크는 확실히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선다.”라고 주장한다. 아마 이 부분이 앞서 말한 자아의 탈중심성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결국 윤리학은 인간학의 면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는 신학적 인간학의 면에서는 보편성을 띄는게 아닐까 싶다. 판넨베르크는 더 나아가서 공동체 윤리를 말하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윤리적 관점을 세워가는 점에서 그 기초를 판넨베르크 신학으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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