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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Feb 07. 2019

"기독교의 본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한줄요약 : 비신앙인이 기독교가 궁금할 때 보면 좋을 책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2018년 2학기에 상담학을 배운 적이 있다. 아무래도 심리학적으로 들어가다 보니 인간학에 가까운 심리와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나 인간의 불안이나 심리상담을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러기 위한 신학에 대한 정의를 인간학적으로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교수님이 추천했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한길사

어쩌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 책을 본다면 엄청난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할 거 같다.


흔히 말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인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포이어바흐의 답변이 유효할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스콜라 철학이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신의식이 인간 의식의 발전이라는 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한한 것의 의식 속에는 자기 본질의 무한성이 의식의 대상이 된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 p.63


결국, 신에 대한 소망이나 원망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 인간의 소망하는 어떤 무한정의 것이 신을 이루는 근본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신을 미워한다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고, 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종교는 이러한 상황을 구분한다.

요즘 인싸 포즈라고 한다...(위키백과 출처)


종교는 인간의 자기 분열이다. 종교에서 인간은 신을 인간에 대립하는 존재로서 정립한다. 신이 아닌 것이 인간이고 인간이 아닌 것이 신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 p.103


종교가 인간의 자기 분열이라고 한다면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분하려는 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학의 관점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그 자체 안에서 성찰되고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 성찰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고백'은 '삼위일체'에 있다. 삼위가 동일하다는 고백 속에서 내재적으로 그리고 경륜적으로 신의 활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그런 삼위일체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만족에서 찾으려고 한다.

고대 기독교들에게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놀라움, 감동, 감격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현실성, 생활 속에서 부정한 인간의 내적인 욕구의 만족이 신 안에서 삼위일체를 통해 직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 p.151


종교는 하나의 판단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그리고 신적 본질이라는 관념에서 가장 본질적인 규정은 칭찬할 만한 것과 질책할 만한 것,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과 공허한 것을 가르는 것이다.


종교가 판단이라고 규정당할 때 그것은 인간의 심정이 된다. 즉,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것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은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교수님의 신학적인 정의가 인간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마음의 소원이 충족된 것이며 기독교의 본질은 심정의 본질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 p.243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포이어바흐의 신학적 정의는 다소 제한적인 것처럼 들린다. 앞서 말한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포이어바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으나 신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본질의 과의식이 신의식으로 향한다는 말은 너무 인간학적인 말이다.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주의자에게 신앙은 상상력처럼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유발 하라리도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에 비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를 종교적인 상상력에서 찾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신앙은 단순히 상상력으로 말할 수 있을 수 없는 신비의 차원이지만 포이어바흐를 빌린다면 그것을 상상력의 차원으로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점 : ★★★ (보다 포기할 뻔한 적이 많았다. 2번을 빌리고 2번을 연장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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