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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r 06. 2019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지안 도메니코 보라시오

한줄요약 : 인간은 무엇을 선택하고 포기할 수 있는가

지안 도메니코 보라시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3년 전에 흥미 삼아 샀던 책인데 겨우 읽었다. 뭐 이유를 들자면 책이 상당히 재미가 없다. 그냥 정말 인문책이다. 그런 점에서 책을 본다면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의 어떤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던가, 독자를 배려하기 위한 친절한 부분은 전혀 없는 듯하다.


1.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1.1. 안락사와 자살, 존엄사 명칭의 차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을 벗어난 것이라 여겨졌고, 자연의 섭리라 인간이 건들 수 없는 운명이라 여겨졌다.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철학적 관념들이 죽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했고, 죽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준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생애의 의지'에 있다. 삶은 너무나도 고달프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는 항상 좌절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불편하고 실망스러운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애의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끝내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종이 질감이나 출판형태는 좋다.

생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의 낙관적인 형태는 의료계는 물론이고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큰 영향을 다.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는 안락사의 문제는 생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명이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낙관적인 부분에 비판을 가한다.


그런 점에서 용어의 문제가 발생한다. 흔히 안락사라고 하는 것과 존엄사의 차이는 크다고 느껴지는데, 특히나 존엄사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존엄하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긍정하기 때문에 저자는 특이한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꾸준히 존엄사라는 표현을 유지한다.


2. 그럼 비판점... 인간은 죽음에 있어서 존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 있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존엄이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의미가 죽음보다 더욱 초월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죽음을 이겨내는 의미가 생긴다. 많은 순교자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행위가 죽음으로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더 발현되는 본래성을 향해 가는 것이 자신이 선택한 죽음이 존엄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2.1. 죽음에의 충동과 삶에의 충동 

그렇다면 보라시오가 말하는 존엄사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존엄사를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의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운명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불나방이 불에 이끌리어 가듯이 인간 역시 죽음에 대해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충동으로 인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보라시오의 말이 맞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에의 충동은 반드시 삶에의 충동에 이끌리어 있다. 흔히 심리학 용어인 '양가감정'에 의하면 이것을 하고 싶지만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모순적인 행동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다이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먹기 싫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비약을 든다면 말이다.


2.2. 그렇다면 우리는 충동을 구분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과 연관이 있다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양가감정으로서 삶에의 충동과 진짜 죽음에의 충동을 구분할 수 있는 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죽고 싶다는 저 사람의 말이 정말로 죽음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보다 살고 싶기 때문에 나타나는 양가감정인지 누가 판단해야 하는 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이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선언이 환자의 의지보다 긍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물론 보라시오가 논증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치료의 불가능성에 처한 사람들에 제한되어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힘듦과 그 힘든 것을 지켜봐야 하는 환자 사이의 수많은 감정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을 간과하고 단순히 생명윤리에 근거해서 반대한다는 것은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소비로 인한 미안함으로 인해 생명윤리를 간단히 여기는 것도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 아무리 책리뷰를 하고 감성을 쓴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직접 경험한 것을 나는 유추밖에 할 수 없으니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


3. 존엄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

자세한 건 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작가는 통계적으로,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존엄사에 대한 긍정을 보이고 있다. 그것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을 일이다. 윤리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고 양심은 주관적이고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합리적 필연성으로 인해서 존엄사에 대해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신이 주신 생명이기에 인간은 죽음을 건들 수 없다고 하기엔 인간의 고통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이유에 따라 인간의 삶은 존엄해야 한다.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 역시 선택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초인 정신'을 가지고 표현한다면 단지 태어남이 신비하기에 존엄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존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는, 더 이상 의지하기 미안해서 선택하는 죽음이 아니라 자기 필연적인 모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지는 존엄하다고 할 수 있다.




평점 : ★★★ (의미가 분명하지만 친절하지 않아서 아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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