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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May 07. 2019

"신학으로의 초대", 스탠리 그린츠, 로저 올슨

한줄요약 : 왠지 공부처럼 읽을 책이지 그냥 취미 삼아 볼 건 아닌 듯

스탠리 그린츠, 로저 올슨, 신학으로의 초대 

나는 도저히 숲과 책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책 목차

1장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다

2장 모든 신학이 같은 것은 아니다

3장 신학의 정의

4장 신학에 대한 변호 

5장 신학의 과제와 전통

6장 신학자의 도구 

7장 상황 속에서 건설하는 신학 

8장 신학을 삶에 적용함 

9장 신학으로의 초대 


1. 책 구성과 전반적인 느낌

1.1. 책 표지는 조금 더 신경을 써주지...

어쩌면 이 책을 처음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 조금만 책 표지에 신경을 써주지 이상하게 신학책은 내용에 집중을 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내용 구성면에 있어서는 아주 좋더라도 책 표지가 그걸 다 깎아먹을 때가 있다. 이게 그런 책이다. 


표시 색감이나, 배경이 너무나도 아쉽다. 신학서적 출판사는 필히 디자이너를 아주 높은 몸값을 주더라도 고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책 제목은 마치 초등학생 때 했던 입체 글씨로 적어놓은 것 같고,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숲 사진은....갑분숲


1.2. 책 구성은 정말 좋다. 

하지만 이런 표지를 넘어가서 한 장을 보게 된다면 "아 이 책은 볼만하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책 구성은 좋은 것 같다. 하고자 하는 말이라던가, 책 크기라던가 이 정도면 적당하고 부담되지 않을 선에서 읽을 수 있다고 느낀다. 


자고로 책이 점점 두꺼워지면 그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읽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입문하기 쉽게 분량을 정했다는 점에서는 제목 값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 "신학으로의 초대"의 주요 내용

2.1. 신학은 누구나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기독교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은 신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엔 교회 안에서 신학의 위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신학이 신앙을 위기로 몰아서 없애버린다거나, 신학이 교회에 전혀 도움이 없다는 것을 실제로 예시로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기본적으로 신앙에 있어서 이성 판단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신앙은 감정적인 부분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 판단을 포함하게 되므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신학을 하지만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있어서 조직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신학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면서 모든 사람이 해당 신학의 분야에 위치하기 때문에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은 성찰적이다. 민속신학보다는 평신도신학이, 그보다는 목회신학이, 스펙트럼 중앙에 더 가까이 놓여있다. 다른 끝을 향하여 나아가면, 전문신학이 있고 민속신학의 제일 반대편에는 학술신학이 있다.
- 스탠리 그린츠, "신학으로의 초대" 중에서 - p.30


신학의 분야에 있어서 분명히 구분되고 있지만 저자는 신학의 목적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신학의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유하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로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각 분야에 해당하는 신학의 목적이 정의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분야에 있어서 무엇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은 없다. 물론 전문성의 차이는 있는 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미개하고 어떤 신학은 발전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신학은 정확한 규명된 목적성을 따르지 않았을 때 변질되는 것이다. 


2.2. 신학과 주변학문의 연관성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는 신학은 건설적이다. 신학을 더불어 교회와 신앙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신학과 대화에서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신학은, 명백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학적 진술들 사이의 관련성을 찾아서 그것들을 하나의 통합체가 되게 한다.
- 스탠리 그린츠, "신학으로의 초대" 중에서 - p.117


역사적으로 내려온 교회 안에서의 문제는 항상 통일성에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라는 역사적 인간이 어떻게 신성을 보이는가와 같은 내용이 교회 안에서 일치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의 고백을 하기 위해 서로를 일치시켰다. 신학은 이러한 일치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좋은 신학은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 신학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적절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저자는 이것은 신학이 당시의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 볼 수 있다. 


문화에서 벗어난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서 할 수밖에 없다.
- 스탠리 그린츠, "신학으로의 초대" 중에서 - p.1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성경의 메시지를 구현해야 한다. 문화에서 벗어난 신학은 존재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서 벗어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신학의 중요성은 바로 균형에 있다. 특히 성경 메시지와 문화와, 교회의 유산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성경 메시지, 문화, 유산의 상호작용에서 신학은 자신의 방향을 잘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세 상호작용은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 각자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만 있을 경우네는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대한 이해, 유산에 대한 인식, 문화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창조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돕는 것에 있다. 


3. 초대라고 하지만 정작 초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 같다

3.1. 평신도를 위한 거지만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을 때 

저자에게 할 수 있는 비판이라고 한다면 정작 초대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신학으로의 초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작 초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기 힘들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는 신학을 여러 형태로 구분하면서 그 모든 형태는 차이가 있지만 목적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전개하는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학술신학에 가깝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신학으로의 초대인지를 알기가 애매해진다. 


흔히 민속신학을 하고 있는 신앙인이 있을 경우, 이 책을 읽을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신학적 의심이 없고 미신적 형태의 신앙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이유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학술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다양한 신학적 방법론을 제외한 채 "사실 다 같은 거 아니겠냐"라고 한다면 쉽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상 이 책은 전문신학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해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신학을 평신도들도 이미 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학적인 내용은 잃지 않고자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학적인 면에서는 난이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난이도가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평신도를 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독자들이 보지 않을 것이라는 결말을 어느 정도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신학을 위한 것도 아니다. 학술신학을 하는 사람을 위해 쓰였다고 하기에는 제목 자체가 이미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보여준다. 


3.2. 상호작용을 말한다는 점에서 우선수위를 간과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지점은 성경의 메시지와 교회의 유산, 문화적 상황의 조화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더 잘 해석하고 영향력 있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 가지의 상호작용은 서로의 우선순위를 잃게 만든다. 잘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우선수위는 성경이 돼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이 세 가지 중에서 성경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동의하겠지만 문화적인 배경과 상황을 너무 고려한 탓인지 성경 자체에 대한 우선성을 조금 간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 뭘 믿는 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세 가지의 상호작용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단순히 회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선포가 되며 현재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역사적 순간을 살았고,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의 믿음과 그 이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다. 분명 그 시기와 상황과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저자가 처음에 언급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점에서 믿음이라는 우선성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세 가지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평점 : ★★★ (평범하다 그럼 3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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