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트라케의 북동 해변에 있는 스타게이(ang?)에서 태어났다. 뭐 그는 대충 잘 살아온 것 같다. 무슨 플라톤에게 배우면서 그의 사상과 언제 결별했는 지는 확실학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했던 철학적 방향이 그를 플라톤의 몇몇 이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1.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 논리학을 창안했으며, 개별 과학들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내었다. 형식 논리는 인간의 사유 형식들과 관련되지만, 논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히 명제들의 상호 관계나 언어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증명 형식들과 관련이 있었고, 따라서 그가 집중한 문제는 인간이 실재에 대해 정밀한 언어로 진술 할 수 있는 것, 즉 어떠한 사물이 존재하며 왜 그것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은 참된 명제들로 구성되며 그것들은 왜 사물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사실과 이유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형성하는 언어다. 과학적 언어는 가능한 엄밀하게 과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제시해 주어야 하며, 왜 사물들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가를 밝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문법학자들이 다루는 방식과는 다른 단어와 언어에 대한 연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유에 대한 연구로서 단어들은 그 사유에 대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는 사유를 분석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실재에 관한 인간의 사유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다.
1.1. 범주와 추론의 출발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하나의 분명한 주제에 관하여 사유할 때 우리는 하나의 주어와 그것의 술어들, 즉 실체와 그것의 우연한 성질들을 고려한다. 우리는 인간이란은 단어를 생각할 때 인간이라는 단어를 "크다"나 "유능하다"와 같은 술어들과 관련시킨다.
우리는 사유 과정에서 사물들을 범주 내에 배열하며 그 범주들을 유, 종, 개체 들로 분류한다. 우리는 개체들을 한 종의 구성원으로 간주하며 그 종을 유에 관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분류를 정신의 인위적인 피조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사유는 사물의 존재 방식과 관련되기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유는 항상 구체적인 개체, 즉 하나의 살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존재 방식과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술어들은 항상 주어들과 관련된다. 술어들이 어떤 사물에 본유되어 있을 때 그러한 술어들이나 범주들은 그 사물에 속한다. 왜냐하면 단지 "그 사물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말'은 그것이 '말'이기 때문에 술어를 갖는 말로 생각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는 것은 '과학'으로 접근하는 일련의 순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물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과정
둘째, 사물들과 그것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사유
셋째, 사물들에 관한 사유의 단어로의 전환
1.2. 삼단논법
아리스토텔레스 하면 당연 떠오른느 것은 '삼단논법'이다. 그는 삼단 논법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사물들이 진술되는 표현 양식이며 진술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그 진술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표현 양식
삼단 논법은 언어 관계의 특수한 형식을 나타낸다. 과학적 논증이 가능한 이유는 사물의 어떤 속성이나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어떤 단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우연적인 속성과 비교할 때 본질적인 속성들을 나타낸다.
삼단 논법은 본질적인 속성에 관한 명제들을 연결시킴으로써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대전제와 소전제의 단일 명사인데 그것은 이 두전제를 연결시킴으로써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다.
삼단 논법의 고전적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죽는걸로 안한다
대전제 : 모든 인간은 생물이다
소전제 : 모든 철학자는 인간이다
결론 : 모든 철학자는 생물이다
꼭 전제가 사실에 들어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삼단 논법은 논리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슨느 세 종류의 추론을 구분한다. 그 각각은 전부 삼단 논법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변증법적 추론
둘째, 논쟁적 추론
셋째, 논증적인 추론
특히 논증적인 추론은 참이며 근본적인데 그 이유는 확실한 전제들, 원리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 1원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논증적 추론은 참된 제 1원인들, 즉 어떤 사물이나 유의 엄밀하게 정의된 속성들로부터의 추론이다.
제 1원리는 관찰과 귀납으로부터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여러 번 관찰하면 그곳에 존재하는 보편자는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저것을 관찰할 때마다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저장하며, 따라서 유사한 저것들을 자주 관찰하게 되며 이 모든 특정한 저것들로부터 하나의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일반 명사가 발생한다.
어떤 사실들에 작용하는 정신은 그것들의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을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어떤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2+2=4를 인식할 때처럼 진리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산술적 진리를 인지하는 경우는, 돌멩이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한 덧셈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러한 구체적인 경우들로부터 어떤 사물들이 어떤 종이나 유에 속한다든지 아니면 수학적 부분들과 같이 존재한다든지 하는 진리를 파악하거나 인지한다.
2.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 지혜라는 형태의 지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본래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그의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본유적 갈망은 단순히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서나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걸망이 아니다.
이러한 실용적 동기들 이외에도 인간에게는 단순히 앎 그 자체를 위하여 어떤 종류의 사물들을 알려고 하는 갈망이 있다.
지식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뭐 불을 만지고나서 뜨겁다는 감각적인 지식도 있고 플라톤이 추구하는 지식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인지한 것을 지혜라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은 감관을 통해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단순히 우리에게 "왜"가 아닌 "저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불을 만지면 불이 뜨겁다는 것을 말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왜 뜨거운 지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정한 경험에 근거하는 이러한 지식은 매우 낮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지혜는 감각적 대상들 및 그것들의 성질로부터 파악되는 지식보다 이상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동일한 사물들의 반복된 경험에서 획득된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 그리고 경험자는 그 대상의 원인들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감각적 경험을 뛰어 넘게 된다.
과학은 정의 가능한 탐구 분야들의 숫자만큼 많이 존재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 중 많은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정치학, 윤리학, 물리학, 미학등이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러 과학의 위계질서 속에서 각각의 사물들이 행해져야 하는 목적을 아는 과학이 모든 과학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이며 어떠한 보조 과학자들보다도 큰 권위를 갖는다고 말한다.
개별 과학이외에도 다른 하나의 과학이 존재하는 데 바로 이것이 제 1철학 이른바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다른 과학들의 주제를 넘어서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실재에 관한 지식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의 지식을 취급한다. 이 지식은 특정한 것 대신에 보편적인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모든 과학은 주제에 대한 제 1원리들과 제 1원들을 취급하는 그 나름대로의 추상적인 수준을 가진다.
지혜는 추상적인 수준의 지식과 관계될 뿐 시각적인 사물들의 수준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모든 과학중에서 가장 정확하다. 그것은 다양한 과학들의 제 1원리 마저도 근거하고 있는 참된 제 1원리들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1. 정의된 형이상학의 과제
다양한 과학은 특정한 것에 대한 제 1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 문제는 과학이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미를 남게 되며 그것은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상당 부분 논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논리학적 관심에서 볼 때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 될 수 있는, 따라서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한다는 것 = 어떤 것"의 공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이며 한정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형이상학은 존재, 즉 현존하는 실체들 및 그것의 원인들, 즉 실체들을 출현시키는 과정들과 관계한다.
2.2. 사물의 제 1본질로서의 실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실체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주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서 발견된다. 범주나 술어들을 염두에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더 잘 인식하는 시기는 우리가 그것의 색이나 크기나 양태를 알 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이다.
정신은 사물을 그것의 모든 성질과 분리시켜 그 사물이 실재로 무엇인가, 즉 그것의 필연적인 본질에 집중한다.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분한다.
누군가 싸움을 잘하는 것은 우연적 속성이다. 누군가는 싸움을 못하기 때문이이다. 그러나 그 둘이 무진장 싸워서 누가 이기든 결국 끝은 죽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본질적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크기, 피부, 능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의 주요 관심사는 실체의 연구, 즉 사물의 본성에 대한 탐구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체는 "하나의 주어에 의해 단언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실체는 어떤 사물의 기초이므로 우리는 그 기초를 알고 난 후에 "어떤 사물"에 관한 다른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기 전에 그것의 본질을 이해한다. 우리가 다양함을 인식하기 이전에 그것들의 본질 속에서 즉 그것들을 보편화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감관으로 현상되는 것은 서로 다양하고 일치하지 않지만 우리가 "어떤 본질"처럼 특정한 성질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탁자를 볼 때마다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본질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보편적 본질은 특정한 성질과 독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2.3. 질료와 형상
플라톤은 이전에 형상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형상에 대한 설명을 반대한다. 특히 그는 형상들이 개체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보편적 형상이 개체안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과학적 지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편자들은 단순한 정신적 허구가 아니라 객관적인 실재를 가진다. 그리고 그 실재는 개체들 그 자체 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형상이 없는 질료로서의 사물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이 부분은 플라톤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2.4. 변하의 과정 : 네 가지 원인
우리는 사물이 변화하고 세계가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화는 운동, 생성, 소멸, 발생, 변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무엇인가
둘째,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셋째, 그것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넷째,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가
에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이 네 가지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이성적인 의미에서 목적을 가진다. 이것은 타고난 운동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은 언제나 목적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서의 변화도 동일하게 네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 형상인 : 어떤 사물이 무엇인가를 결정함
둘째, 질료인 : 사물이 만들어지게 됨
셋째, 작용인 : 사물을 만듦
넷째, 목적인 : 사물이 만들어짐
2.5. 가능태와 현실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만물은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 각각의 사물은 힘을 소유하며 그 힘은 사물의 형상이 그것의 목적으로 설정했던 것을 실현한다. 만물 속에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힘이 존재한다.
만일 도토리의 목적이 나무가 되는 것이라면 아직 현실적을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도토리는 잠재적인 한 그루의 나무다. 그러므로 변화의 궁극적인 양식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변화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이 지니는 주요한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태를 가능테에 선재하는 것을 주쟁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달걀보다 닭이 먼저라고
만일 만물이 변화 즉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있다면 만물은 가능태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태가 존재하기 전에 현실태가 존재해야 한다. 잠재적인 사물들의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적이나 소멸하는 사물들보다 더 상위 수준의 어떤 현실태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가정하게 되었다.
변화는 일종의 운동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시적 세계를 운동 가운데 사물들로 구성된 어떤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잠재적인 운동 중에 있는 사물들은 현실적으로 운동 중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2.6. 부동의 동자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동의 동자를 설명한다. 부동의 동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물론 그는 이 부동의 동자를 창조주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능태와 현실태를 구분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게 된다.
운동이나 변화의 발생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 모든 가능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동자는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의 작용인도 아니며 의지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운동을 설명해 주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 말고 어떠한 종류의 존재도 아닌 것이다.
부동의 동자는 현실적인 운동의 원리이며 어떤 가능태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의 영원한 원리이다. 또한 부동의 동자를 통한 운동의 설명은 영원한 활동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물의 세계가 진행 중에 있지 않았을 대에도 결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부동의 동자는 사실 종교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과학적이다. 부동의 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한 명의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인다.
즉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형상으로서, 세계를 실체로서 간주한다. 그는 자신의 네 가지 원인론의 관점에서 부동의 동자를 목적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은 추후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설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3. 인간의 위치 :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동물의 동물의 구별을 만물의 위계질서를 통해서 하고자 한다. 어떤 것은 본성적으로 존재하고 어떤 것은 다른 원인들로부터 존재한다.
3.1. 물리학
사물들이 자연계 내에 존재하게 되는강의 문제에만 우리의 관심을 국한 시킬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출발점은 제 1 질료가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형상과 순수 질료가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제 1질료는 혼자만으로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없다. 질료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형상들을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과정은 한 형상에서 다른 향상으로의 끊임없는 질료의 변형을 내포한다. 조각가가 하나의 상을 조각할 때 대리석이라는 그의 재료는 이미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계 내에는 어떠한 원질들이 존재하며 사물들은 그것들의 본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3.2. 생물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본성을 규명함으로써 비유기체에 유기체로의 전이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제일 원소들의 결합이지만 어떤 것은 생명을 가지며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생명이란 자생과 성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질료 그 자체는 생명의 원리가 아니다.
질료가 항상 가능태인 반면, 형상은 현실태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육체는 현실태의 근거인 형상으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영혼은 유기체의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영혼은 본성적인 유기체의 현실태 가운데 제1등급이다. 한 육체가 생명적 특성을 지니게 될 때 그 육체의 부분도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다. 영혼은 한 사물의 본질을 정의해 줄 수 있는 법칙이다. 영혼은 하나의 특수한 육체가 있을 때 존재한다. 즉 사물은 그 자체에 내에서 운동하며 또한 그 자체를 구속하는 힘을 갖는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일체가 지닌 형상과 질료다. 따라서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세 가지 형태를 구별한다. 이것은 하나의 물체가 생명을 표현 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을 나타내 주기 위한 것이다.
첫째, 식물의 영혼 : 단순히 살아 있음의 행위
둘째, 동물의 영혼 : 살아 있음과 감각을 동시에 포함
셋째, 인간의 영혼 : 살아 있음과 감각과 사유 행위를 포함
3.3. 심리학
감각적인 영혼은 동물의 수준에서 발견된다. 그것의 주요 특성은 질료를 통하지 않고 사물의 성질과 형상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다시말해 감각적인 영혼은 단지 질료는 알지 못한 채 형상에만 열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라는 개념을 사용해 감각적인 영혼이 사물들을 감각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감관은 어떠한 성질과 잠재적으로 부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 눈에는 푸르게 될 수 있는 가능태를 지닌 물질이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이 감각될 때 그 물질은 실제로 푸르게 된다. 눈의 이러한 중립적 물질은 잠재적으로 모든 색과 모양을 소유해야한다.
우리가 감각한 성질들은 하나의 대상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경우에도 계속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현상을 기억과 상상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우리가 회상하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는 감각과 기억이 결코 임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재생산해 주는 행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과 상상의 능력으로부터 결국 영혼의 최상의 형식인 인간의 영혼이 발생한다.
3.4. 인간의 이성
인간의 영혼은 좀 더 낮은 형식의 영혼들, 다시 말해 식물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영혼을 결합시키며, 이들 영혼 이외에도 이성적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이성적 영혼은 과학적 사유의 힘을 지닌다. 이성은 사물들 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분석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 간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란 육체를 결정해 주는 결정적인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존재할 수도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하나의 실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이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던 사실과는 뚜렷하게 대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를 밀접히 관련시키면서 육체가 죽으면 그것을 조직화 하는 원리인 영혼도 함께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적 영혼은 감각적 영혼과 마찬가지로 가능태로서 특징을 지닌다. 이성적 영혼은 사물의 참된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성은 단지 잠재적으로만 그 본성에 대한 지식을 지니므로 그것은 그것의 결론들로부터 추론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사유는 하나의 가능태이지 연속적인 현실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지식을 획득 할 수도 있지만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의 지성은 결코 연속적으로 현현되지 않는다.
진리의 연속성을 암시해 주는 것은 세계의 연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이 소유하는 잠재적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며 연속적인 것이다. 이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세계의 영혼이며 세계의 지적 원리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이 어떤 순간에는 작용하면서 다른 순간에는 작용하지 않는 일이 결코 없다.
여기서 그는 개인의 지성과 능동적 지성을 구분한다. 전자는 간헐적으로 인식하는 지성이며, 후자는 개인과 어느 정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지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능동적 지성은 부동의 동자의 원리와 동일하다. 부동의 동자의 판명한 행동은 순수 행위이며, 순수 행위는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와 완전히 조화된 정신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가지적 구조로서 간주된 형상들의 전 체계는 세계의 영혼, 부동의 동자, 능동적 지성에 대한 연속적인 지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이야 말로 불멸적이다.
진리에 대해서 인간적 지성이 인식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능동적 지식을 지닐 수 있다. 인간이 죽을 때도 죽지 않는 것은 능동적 지성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 개인의 영혼은 그것의 질료인 육신과 함께 사라진다. 오직 순수한 활동만이 영원하다. 따라서 가능태와 혼합된 인간의 실체는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
4.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안에 있는 만물에게는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이나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둔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예술과 학문 그리고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선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그것을 인간이란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정의의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원리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발견 될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의 현실적인 행동을 통해 획득 될 수 있는 것이다.
4.1. 목적의 종류
모든 행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의 목적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 : 다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지는 것
둘은 본래적 목적 : 행위들은 그것들 자체를 위해 수행한다.
예를 들어서 목수는 막사를 건축한다. 만약 그 막사가 완성되면 목수로서의 그의 기능은 실현된 것이며 그 막사의 경우도 그것이 병사들을 위한 안전한 주거를 제공할 수 있다면 막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목수와 건물에 의해 달성된 목적들은 그 자체로 본래적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들이다. 왜냐면 병사들의 거주라는 수단으로서 막사가 이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목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때 우리는 모든 다른 행동을 수단으로 삼는 그것 자체를 위한 행동에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동이 "선"이라는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물의 특수한 기능과 연결시켰다. 망치의 경우에 어떤 망치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ㄷ르이 망치들에 대해 기대하는 기능을 그것이 수행했을 경우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의 기능을 판명하게 발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한 인간이란 인간으로서 자신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4.2. 인간의 기능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목적은 단순한 생활의 영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식물들에게도 분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인간 존재로서의 사람의 기능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이라는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본성을 묘사하려고 하였다.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므로 인간 전체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눠진다. 또한 비이성적인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식물적인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갈망 또는 육망의 부분이다.
도덕은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인도를 의미한다. 더욱이 선한 인간은 선한 행위를 시시각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생활이 선으로 항상 충만해 있는 사람이다.
4.3. 목적으로서의 행복
인간의 행동은 그것에 적합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어디서나 쾌락과 부와 명예를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이며 최종적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사실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행복을 다시말하자면 그것은 선이다.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위해 실현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게된다. 도덕성의 일반법칙은 정의로운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비이성적인 부분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으로서의 욕망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 즉 대상물들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외적 요소들에 반응하는 욕망의 두 가지 근본형식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증오다. 사랑이 인간에게 사물들이나 인간들을 갈망하도록 한다면, 증오는 그것들을 피하거나 파괴하도록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도덕은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의 발전과 관계한다.
4.4. 중용으로서의 덕
인간의 정념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덕이 높은 과정은 과도함과 결핍의 중간 입장, 즉 중용이다.
예를 들어서 용기는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을 실행하는 상태이며 상대적인 중용 속에 머무는 상태이다. 이성에 의해 결졍되는 상태이며 실천적이며 지혜로운 인간이 결정하는 상태다. 그러므로 덕은 중용에 따라 선택하는 습관이다.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식사할 때 성인과 어린이에게 알맞은 식사량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양장에게도 적절한 중용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이다.
도덕은 인간을 자발적으로 중용에 이끌리게 하는 습관의 배양에 달려 있거나 또는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나쁜 행동을 피하려는 습관을 기름으로써 생겨난다.
4.5. 심사숙고와 선택
이성적 영혼에는 두 종류의 이성적 기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론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확고한 원리들이나 철학적 지혜를 제공해준다.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발견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도덕적 행동에 대해 이성적인 지침을 제공해준다. 이는 실천적 지혜다.
이성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만일 이러한 이성적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결코 어떠한 도덕적인 능력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강조한다.
인간은 올바른 행동을 위한 생득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행위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은 무한한 수의 가능성들로 이루어진다. 선이란 인간 내부의 가능태다. 그러나 도토리가 거의 기계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도토리나무가 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것을 현실태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행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하고 그것에 관해 심사숙고해야 하며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한다.
자유 선택과 인간의 책임 간에는 중요한 연관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는 자벌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 정상이 참작되며 때로는 동정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과 비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4.6. 관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인 영혼으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식물적인 영혼과 감각적인인 영혼도 포함된다. 덕은 이러한 본성상의 여러 능력들에 대한 거부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인간은 자신의 모든 능력, 즉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를 사용한다.
인간 내부의 이러한 두 영역에 대응하는 이성의 두 가지 기능이 존재한다. 하나는 도덕적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지적 기능으로서 그 각각은 나름대로의 덕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철학적 지혜와 지적 진리의 관조 행위에 대한 논의로 윤리학에 관한 자신의 주요 저작을 결론짓는다. 만일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최고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합당하다. 이러한 행위는 관조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행위할 때보다도 더 연속적으로 진리해 관해 관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행복이 그것과 결부된 쾌락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5.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도 목적의 요소를 강조한다. 자연은 국가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하나의 고유한 기능을 부여해준다. 이 두가지의 개념을 결합시키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란 자연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인간도 자연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국가를 밀접히 연관시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사회 속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족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욕구도 갖지 않은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면 신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본성은 운명적으로 국가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고, 국가도 다른 공동 사회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을 목적으로 성립되며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지 않았다. 비록 그가 국가를 인간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대행자로 간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 이론은 여러 실천적인 문제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5.1. 여러 형태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 공동 사회는 환경에 따라 적어도 세 가지 정부형태를 조직화 할 수 있다. 그 세 형태의 근본적인 차이는 각각의 통치자 수효에 의해 결정된다. 즉 한 정부의 통치자는 한 명일 수도 있고 소수일 수도 있으며 다수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진정한 형태는 한 명에 의한 통치 형태와 소수자에 의한 통치형태, 다수자에 의한 통치 형태다. 이와 달리 타락한 형태는 전제정, 과두정, 민주정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그가 선호한 것은 귀족정이다. 그 주된 이유는 한 명의 특출한 인재도 이상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러한 인물이 충분하게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5.2. 차이와 불평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대부분 사실에 대한 관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에 대한 그의 이론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그 부분은 그의 노예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노예들은 항상 힘이 세고 장대하다는 사실을 관찰한 결과 그는 노예란 자연의 산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다. 따라서 노예제는 있어 마땅하며 동시에 올바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 사람들과 정복 전쟁에 의해 노예가 된 사람들을 확연히 구분했다. 그는 전자를 노예로 인정하고 후자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권의 불평등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시민권이 부여되는 기본적인 자격은 지배할 수도 있고 지배를 받을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했다. 즉 시민은 정의로운 행정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시민은 정치 집회와 법정에 출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적합한 기질과 인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에서 노동자까지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도 없고 적합한 정신이 계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들이 정책 과정에 참여한다고 해서 이익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5.3. 선한 정부와 혁명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지점은 국가란 인간의 도덕적이며 지적인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단순히 삶의 영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 존재한다.
한 국가가 선한 삶을 낳을 수 있는가는 그 국가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정의로운 정부형태는 통치자들이 만민의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사악한 정부형태는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영리만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민주제가 기초하는 가정은 어떤 면에서 평등한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도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같이 자유롭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그러나 과두제는 한 가지 측면에서 불평등한 모든 사람은 모든 면에서도 불평등하다고 가정한다. 즉 재산의 소유에서 불평등 하므로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가 백성들로 하여금 훌륭한 삶이라고 여길 만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 조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국가를 비판할 수 있다.
6. 예술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훨씬 긍정적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예술은 본질적으로 모방, 즉 자연에 대한 모방의 문제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동일하게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형상이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술가는 보편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사물들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인식적 가치를 인정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시학"에서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시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특수한 인간과 사건을 취급하는 역사가와 달리 시인은 인간의 근본을 다룬다. 따라서 시인은 보편적인 경험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보편성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어떤 경우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행위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시가 지향하는 것도 이러한 보편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은 인식론적 가치 이외에도 매우 중요한 심리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선 예술은 인간 본성의 심층 구조를 반영하며 바로 이러한 점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고 모방에 대한 본능을 심어준다.
그는 "서사시"와 "비극"과 "희극"에 대해 분석하기를 원했으며 그 각각의 구성 요소와 기능을 제시학 있기는 하지만 후세의 사상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것은 그의 비극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특히 비극의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고,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