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인식론, 도덕철학, 정치철학, 우주론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간단하게 건너뛰고 아무튼 화이트헤드의철학 말처럼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이다 라고 했으니 후다닥 플라톤부터 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완전한 지식이나 절대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식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변증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증술이란 대화의 기술로서 한 가정이나 가설을 끊임없이 반대의 주장과 대비시키는 기술이다. 이거 진짜 싫음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이였고 정치적인 환멸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는 않고 지식 훈련을 하는 것에 큰 열정을 두었다.
플라톤은 엄청난 저작활동을 하는데 학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대화편을 나눈다.
초기 저작들은 윤리학에 집중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에우티프론", "에우티데모스", "크라틸로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두번째 부류는 이데아론과 형이상학이 제시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메논", "항연", "파이돈", "국가론", "파이드로스"
후반에 지은 저작은 주로 자연의 구조를 다룬 기술적인 대화편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다.
"테아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정치가",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법률"
그의 저작들은 확실히 하나의 구성체계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구조적인 철학 체계를 조직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의 많은 대화편은 충실한 철학 체계의 요소들을 내포한 것은 사실이지만 추후에 조직화 했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해석의 여지가 남기는 한다.
1.1 동굴의 비유
뭐 흔히 하는 동굴의 비유니까 그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굴안에 있으며 비치는 상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림자를 보고 있고 그 동굴에서 나가는 사람은 햇살을 맛본다는 사실이 중심이다.
동굴의 비유는 대부분의 인간이 동굴의 어둠 속에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그림자의 불투명한 세계 주변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을 정해놓는다. 인간을 동굴에서 빛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눈먼 인간에게 시력이 부과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며 교육도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에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교육의 중요성은 전회의 문제, 즉 현상계에서 실재계로 완전한 전회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눈은 이미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의 전회는 영혼의 눈에 시력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향으로보는 대신에 마땅히 보아야 할 방향으로의 전회를 의미한다.
동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지고의 지식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고결한 관조의 세계에 계속 남아 있어서는 안되며 동굴로 다시 내려가 죄수의 생활과 노동에 참여 해야한다.
두 개의 세계, 즉 어두운 동굴의 세계와 밝은 빛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소피스트와 회의주의에 대한 반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확실한 것이다. 지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가장 실재적인 어떤 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면서 각자 자신이 가진 개념도 다르며 이야기하는 정의도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한다. 그것은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림자에 의한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이 매우 다양한 그림자의 배후에 있는 실재적 대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은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1.2. 분리된 선분의 비유
따라서 플라톤은 "분리된 선분"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정도와 수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네 가지의 발전단계를 통해 이동한다.
X에서 Y로의 수직선은 연속적인 것이며 지점마다 어떤 정도의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선이 실재의 최하급 형태로부터 최고급 형태로 진행됨에 따라 이와 평행하게 진리도 가장 낮은 정도로부터 가장 높은 정도로 발전한다.
1.2.1. 상상
상상의 영역은 가장 낮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신은 허상들이나 최소한 최소량의 실재와 상응한다. 실제로 그림자는 실재적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실재적인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나 상상을 최저급의 지식 형태로 만드는 것은 다른데 있다. 즉 이 단계에서 정신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그림장잉거나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데에 잇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보는 것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상상이나 허상의 단계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동굴 속의 죄수들은 가장 깊은 무지의 덫에 걸려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플라톤이 또 격하게 분노하는 허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술가와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들이다. 예술가들은 참된 실재로부터 최소한 두단계 떨어진 허상들을 표현한다. 누군가 사과를 그린다면 사과는 과일이라는 이데의 표현이며 그것을 그리는 건 이데아의 표현에 대한 표현이다. 즉 모방에 대한 모방이다.
어쨋든 상상이란 어떤 사람이 그가 허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를 의미하며 따라서 상상은 환상이나 무지와 마찬가지다.
1.2.2. 신념
상상 다음은 신념이다. 플라톤은 현실적인 대상을 봄으로써 생기는 정신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인식한다는 단어보다 믿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뭐 잘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을 관찰할 때 느끼는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신념이 비록 관찰에 기초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속전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가시적 대상에 의해 생겨난 정신 상태는 상상보다는 분명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비록 현실적인 사물들이 그것의 그림자보다는 더 많은 실재를 소유하지만, 그것들 스스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2.3. 사고 작용
누군가 신념에서 사고 작용으로 넘어간다면 그는 이제 가시계에서 가지계로 넘어간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고 작용을 과학자의 특성으로 보고 있다. 과학자에게 가시적 사물이란 생각될 순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실쟁의 상징들이다.
수학자는 "추상화"의 작업, 즉 가시적 사물들로부터 그 사물이 상징하는 것을 이끌어 내는 작업에 종사한다. 수학자는 어떤 삼각형을 볼 때 "삼각형의 본질"이나 삼각형 그 자체에 관해 사유한다. 그는 "가시적" 삼각형과 "가지적" 삼각형 사이를 구분한다.
또한 정신은 정삼각형의 세 각은 그 삼각형의 크기에 상관없이 균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유는 개개의 실재적인 대상이 여러 가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집합에서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하나의 가시적인 대상으로부터 추상화 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니까 쉽게 말하면 다양한 사람을 보더라도 "인간"이라는 이데아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4. 완전지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만물의 만물에 대한 관계를 파악해야 하며, 모든 실재에 대한 통일성을 알아야 한다. 완전지와 함께 우리는 감각적 대상들로부터 완전히 풀려난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형상을 취급한다. 형상은 현실적 대상들로부터 추상화된 보편적 삼각형과 인간과 같은 가지적 대상들이다.
이 상태에서는 어떠한 가설도 초월하여 모든 형상의 통일로 지향할 수 있을는 것이며 최고 수준의 지식으로의 접근이 가능하다. 우리는 변증법이라는 지적 능력을 통해서 그것의 가장 높은 목적을 향할 수 있다. 완전지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의미하며 플라톤에게 이것은 지식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1.3. 형상론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작업이다. 한마디로 말해 형상이나 이데아는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그것의 조합된 모사에 불과하다.
삼각형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그 형상의 모사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참된 실재이다. 그것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야 플라톤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의 질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상론은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은 실재적인 세계는 가시계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계라고 결론을 낸다. 플라톤에 의하면 가지계는 영원한 형상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장 실재적인 것이다.
1.3.1. 형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아름다운 인간은 보편적인 미의 모사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인간은 많든 적든 이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한된 형태를 인식하고 그로 인하여 어떤 아름다움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물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서로 다름에서 일치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물질적 대상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으로 옮겨가게 된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는 모든 아름다운 형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의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미의 근원인 미의 이데아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의 이데아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즉 그것은 객관적인 실재를 가진다. 미는 하나의 이데아다. 사물들은 아름다게 된다. 그러나 미의 이데아는 항상 그러하다. 따라서 미의 이데아는 자신의 안팎으로 움직이는 변화하는 사물과 별도의 존재를 갖는다.
플라톤은 형상들이 영원한 존재를 가지며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1.3.2. 형상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플라톤의 명백한 이해는 형상들이 구체적인 사물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보는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떨어져 있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형상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특정한 사물이 존재하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형상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강조한다.
영혼의 선재론과 관련하여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이미 형상과 친숙하다
창조의 과정에서 데미우르고스 즉 조물주는 특정한 사물을 만들어 내는 데 형상을 사용했으며 이는 형상들이 사물로의 채현 이전에 이미 존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형상들은 "신의 정신' 속이나 "합리성의 최고의 원리" 속에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1.3.3. 형상과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형상은 세 가지 형식으로 사물과 관련되며 이는 동일한 사항에 관해 언급하는 세 가지 방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형상은 사물의 본질의 원인이다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모방하거나 모사한다고 말해도 좋다
1.3.4. 형상들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형상을 함께 엮음으로써만 언설을 행할 수 있다
사고 작용과 논의는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사물 이상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사물이 현시하는 본질이나 보편자의 용어로 이야기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언급한다.
우리의 언어는 형상과 형상을 관련시키는 일을 한다. 우선 동물의 형상이 존재하며 그것의 속류로서 인간과 말의 형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형상들은 서로 유와 종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형상은 그들 나름대로의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얽혀 있다.
동물의 형상은 말의 형상에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한 형상은 다른 형상을 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구조를 나타내는 형상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그 가운데 가시계는 단지 하나의 반영에 불과하다.
이 형상의 위계질서가 하부로 내려가면 갈수록 우리는 "빨간 사과들" 같이 점점 시각적인 대상에 가까워지며 따라서 지식은 점점 더 보편적일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형상은 점점 더 추상적이게 되며 지식은 더 넓어진다.
1.3.5. 우리는 어떻게 형상을 인식하는가?
플라톤은 정신이 형상을 발견하는 방식을 최소한 세 가지로 제시한다.
상기의 방식으로써 인간은 그들의 정신이 존재의 선험적 상태에서 인식했던 것을 상기한다.
인간은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형상의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변증법이란 사물의 본질을 추상화하는 힘이며 지식의 모든 부분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힘이다.
갈망의 힘 즉, 사랑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향연"에서도 서술했던 바 그대로 인간을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운 사유로, 더 나아가 미의 본질 바로 그 자체로 단계적으로 나아가게 한다.
플라톤의 표현에 따르면 대화는 우리를 형상으로 이끄는 단서다. 왜냐하면 대화는 보는 것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특정한 사물만을 볼 수 있지만 대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고 작용은 보편적인 것, 즉 형상을 파악함으로써 특정한 사물을 떠나게 된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자연스럽게 윤리학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인간이 자연의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현상들에 의해 기만당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가능성은 도덕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는 것이 덕이라는 말을 수용해서 더 발전시킨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다듬어서 영혼의 개념과 기능으로서의 덕의 개념을 강조했다.
2.1. 영혼의 개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는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흔히 이성, 기개, 욕망으로 구분된다. 그는 모든 인간이 분유하고 있는 내적 혼란과 갈등에 대한 공통의 경험으로 이러한 영혼의 3분법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이 갈등의 본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첫째, 목적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 이성의 행위
둘째, 행동을 위한 충동, 즉 기개
셋째, 사물들에 대한 신체의 갈망, 즉 욕망
플라톤은 영혼이 없는 삶을 상상하지 않았으며 모든 활동을 영혼에 귀속시킨다. 신체는 그 자체로서는 생명이 없다. 따라서 행동하거나 움직일 경우에 신체는 삶의 원리, 즉 영혼에 의해 조종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은 행동을 위해 하나의 목적을 제시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은 감각적 욕망에 의해서 전도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파이드로스"에서 그 유명한 전차와 마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대충 티키타카 하는 느낌으로 이성과 욕망은 캐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혼의 이성적인 목적은 삶의 참된 목적을 구하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을 그것의 본성에 맞춰 평가함으로 가능하다.
이성의 고유한 역할은 그 환상의 세계를 관통ㅇ해 참된 세계를 발견하며 욕망의 방향을 진정한 대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행과 인간 영혼의 무질서는 인간이 형상과 실재를 혼동한 결과이며 이러한 혼동은 거의 욕망이 이성이 압도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악을 무지의 결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2. 악의 원인 : 무지 또는 망각
앞서 말한 것처럼 도덕적인 악을 무지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악의 원인은 영혼 그 자체의 본성에서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서 발견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에 들어가기 전에 선험적 존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비이성적인 부분도 다시 기재와 욕망으로 구분된다. 이 두개의 구성물은 하나는 고양됨으로 하는 육신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 원인은 어쩌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악이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의 한 특성, 즉 영혼의 망각에 대한 가능성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망각하고 지상의 사물들에 대한 관심에서 끌려 내려온 것도 바로 그러한 영혼인 것이다. 영혼은 본질상 완전하지만 그것의 한 측면에는 무질서로 이끌릴 수 잇는 가능성이 있다. 피조물의 다른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영혼은 완전성과 동시에 불완전성의 원리도 내포하고 있다.
육신은 영혼의 조화를 방해한다 육신은 영혼이 참된 지식이 지향하지 못하도록 하며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지식과 성급함, 욕심을 설명해 주는 것은 육신이다. 이성과 기개와 욕망의 정결한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육신이다.
2.3. 상실된 도덕의 회복
플라톤에게 있어서 도덕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과 육신의 자극에 의해 전도되었던 과정을 다시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살인이나 거짓말 같은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잇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행위들로부터 자신이 어느정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것은 잘못된 지식이며 인간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도덕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가 곧 덕이다"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잘못된 지식은 사물 및 행위와 그것들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러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의 계몽에 의해서고 가능할 수 있고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가능할 수도 있다. 누군가 다양한 사물들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할 때 그는 사람들 그 자체로부터 이데아로 초월하기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지만 죄수가 사슬로부터 풀려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강제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눈을 뜰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사람을 깨우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각성시키고 그의 사슬을 풀어주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훌륭한 삶의 교사는 죄수를 돌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죄수는 그림자로부터 실재 세계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그의 지적 상승과 평행한다. 인간의 점증하는 지식은 진선미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랑을 좀 더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참된 지식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사소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덕은 지식, 모든 행위의 참된 결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
2.4. 기능의 실현으로서의 덕
플라톤은 선한 삶이라는 것을 내적 조화와 안녕, 그리고 행복이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덕이란 관습이나 속견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본질 자체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개와 욕망을 인식하고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본질이다.
이성은 하나의 기능을 가지며 따라서 이성은 그 기능을 발휘 할 때만 선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욕망에 의해 밀려난다면 이성은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종종 선한 삶을 사물들의 효과적인 기능의 발휘와 비교하고는 했다. 칼은 잘 자를 수 있을 때 선한 것이며, 의사는 의료활동을 잘할 때 선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삶의 기술도 비슷한 종류의 한계와 분수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영혼은 다양한 기능을 갖지만 이 기능들은 지식이나 지성에 의해 규정된 한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덕은 기능의 실현이기 때문에 기능의 수만큼 많은 덕목들이 존재할 것이다. 영혼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덕은 각각의 기능을 실현 할 때 이루어진다.
욕망의 조절은 절제의 덕을 낳는다.
기개의 의지에 대한 한계를 조절하는 것은 절제의 덕을 낳는다.
이성이 욕망에 동요되지 않고 이상을 지킨다면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이 세 가지 덕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절제가 욕망의 이성적 통제라면 용기는 기개의 이성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영혼의 각 부분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네 번째 덕인 "정의"가 이루어진다. 정의는 각 부분에 각각의 고유한 의무를 부과하므로 보편적인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욕망과 기개가 이성의 권위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 이성이야 말로 인간 행동의 능력을 지도하며 온갖 갈망과 애정을 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은 도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하나의 거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세 가지 덕은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도덕적인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정의의 특징이다.
3.1. 인간의 거대 형상으로서의 국가
플라톤에게 국가는 개인의 본성에서 추론되고 있으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개인이 국가에 선행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는 하나의 자연적인 제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경제적 욕구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계층은 두가지로 구성된다. 농부, 장인과 같은 상인 계층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 사회를 수호하는 전사 계층이다. 특히 전사계층에서 엘리트는 국가를 통치하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다. 따라서 국가 내의 세 계층은 영혼의 세 부분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개인의 욕망과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노동 계층 사이의 관계
인간의 기개의 요소와 그 역동적 힘을 거대한 규모로 변형한 군대 조직 사이의 관계
이성적 요소와 지배자의 영도력이라는 특수한 기능 간의 관계
3.2. 철인 군주
국강의 지배자는 특수한 능력을 구비한 사람이어야 한다. 국가에 있어서 무질서는 개인에게 있어서의 무질서가 발생하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 의해 야기된다. 즉 더 낮은 요소들이 좀 더 높은 임무의 역할을 침범하려는 시도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통치자는 충실히 교육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즉 가시계와 가지계의 차이, 속견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의 차이, 현상과 실재의 차이를 이해해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어야 한다. 철인 군주는 교육을 통해 분할된 산분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 따라서 모든 진리들의 상호성을 개관할 수 있어야 한다.
3.3. 국가의 덕목들
영혼의 세 부분이 세 가지 덕을 이루듯이 그것의 연장선인 국가도 세 계층이 덕목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쓸모를 다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처럼 각 계층이 자신의 일을 담당하는 것이 선을 이룬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욕망의 요소를 채현하는 장인들은 절제의 덕을 보여준다.
국가를 수호하는 전사들은 용기의 덕을 보여준다.
국가의 정의는 절제와 용기와 지혜의 조화이다.
재미있는 점은 지배자 계층은 어떠한 소유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전사들이 두려워 해야 할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다. 소유함은 자신의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어 용기를 실현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전사의 생활양식은 사적 소유와 격리되어야 한다.
3.4. 이상 국가의 몰락
국가는 거대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룬 내적 조화의 정도에 따라 종류가 구분된다. 다섯 가지 정부 형태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귀족제, 명예제, 금권제, 민주제, 참주제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귀족제에서 참주제로의 전환은 국가의 질에 있어서 점차적인 몰락이다. 이는 지배자와 시민들의 도덕적 성격의 점진적인 타락과 대응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귀족 국가다.
명예제에서는 사유 재산 제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부에 대한 갈망은 금권제라는 정부 제도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부다.
민주제는 더 퇴보된 체제다. 그니까 왜 소크라테스 죽여가지고.. 평등과 자유의 원리는 퇴락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다. 인간은 평등한 자유라는 명목으로 온갖 욕망을 추구한다.
우주로는 주로 "티마이오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관심이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과학을 힐끗힐끗 보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는 세계가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목적과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의 생성을 원자들의 우연적인 충돌로 설명하였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한다. 오히려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개념을 많이 사용한다.
우주에는 지성의 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과 세계는 상호 유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우선 지적이고 영원한 요소를 함유하며, 그 다음으로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를 함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원성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인간 속에 표현된다.
플라톤은 정신이 만물을 배열한다고 주장했으면서도 창조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창조론이란 사물이 무로부터 창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가시계의 깅원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창조론을 무시한다. 물론 플라톤은 생성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동인을 통해서 생성된다고 말하고는 있다. 아마 그가 말하는 동인은 조물주나 데미우르고스를 뜻할 것이다.
조물주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스러운 것에서 질서를 배양한다. 그러므로 조물주의 상과 그가 작용하는 질료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가시계에서 사물의 발생을 설명할 때 플라톤은 사물의 모든 성분들의 존재, 즉 사물을 구성하는 성분들의 존재를 가정하며 동시에 조물주와 이데아나 형상 또는 사물들이 그것을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형식을 주장한다.
흙이든 물이든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이데아나 형상의 반영이며 이들 형상은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서 표현된다. 물과 흙처럼 감관을 통해 질료나 실체로 생각된 요소들은 단지 성질들 뿐이며 그 성질은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세계 내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데미우르고스의 활동에 방해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데미우르고스가 가능한 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세계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선하지 못하다. 데미우르고스는 신적 이성이며 우주의 질서를 형성해준 동인이다. 이 우주의 발생은 필연과 이성의 결합의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연은 세계 안에 있는 악의 존재들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악은 목적의 파괴이고 목적은 정신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질서의 파괴에 기여하며 따라서 악의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시간에 관해서 플라톤은 현상이 만들어진 후에야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사물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그때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시간의 의미는 바로 변화이며 따라서 변화가 없는 것에는 시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