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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r 18. 2020

잊히기를 선택한 사람들

    잊히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자기 자리를 떠나 다른 나라로, 낯선 말을 하는 사람들 틈으로. 자국自國에 미련을 두면 둘수록 괴롭고 외로워,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서 잊히기를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새 말을 배우고 새 법을 익히며 새로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가도 몇 년 만에 들린 고향에서 여전히 자기를 기억해주고 반겨주는 이웃들을 만나면 마워하고, 안도하기도 한다. 아아, 아직 잊히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그런 환영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채비를 차리고 먼 길을, 자기가 가야하는 길을 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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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시간은 참기 힘들었다. 남들보다 늦게 체크인을 한 탓인지, 싸구려 표를 구입한 탓인지. 내 자리는 뒤로 젖힐 수 없는 꼿꼿한 90도 의자였고, 앞의 의자는 내 코 앞까지 젖혀있었다. 답답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다른 데다 온 신경을 쏟는 게 맞겠다 싶어 얼른 영화를 틀었다. 애니메이션 <코코>였다.


    '아, 저 말이 코코에서 나온 말이었구나.'


    진짜 죽음은 사람들에게 잊힐 때 찾아온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 보았지만 그게 어느 나라 속담인지 아니면 어느 영화 대사인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반가웠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좁고 어두운 자리에 파묻혀 그 말을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왠지 밉게 느껴졌다. 칫,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잊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치사한 해석은 좁은 자리 탓도 아니었고, 영화가 못난 탓도 아니었다. 그건 배알이 뒤틀린 탓이었다. 그때의 나는 원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거나 원하는 일을 포기해야 했고, 해야 할 대부분의 일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들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만 나의 말은 무시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지만 나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건 잊힌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고, 나는 잊히고 있었다. 동료들에게서, 선후배들 틈에서. 나는 그게 너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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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구, 그때 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몰라."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안 괴로워? 상황은 똑같잖아."

    "괴롭고 안 괴롭고를 떠나서, 그냥 조금 부끄러워."


    그게 왜 부끄럽냐는 친구 말에 나는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살겠다고 아프리카로 떠난 선배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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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일 뿐만 아니라 답답한 고민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 든든한 멘토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함께 일하던 어느 날, 선배는 오래도록 꿈꿔온 일을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쉬웠지만, 아예 못 보게 되는 건 아니니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선배를 마음껏 드높이며 그를 아프리카로 떠나보냈다. 대단하다고, 정말 멋지다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잠깐 한국에 들어온 선배 부부를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까맣게 탄 피부와 핼쑥해진 두 뺨이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대언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두 분은 행복해 보였다. 선배는 나에게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 했다. 에이, 선배. 어떻게 잊어요.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얼마간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쯤, 선배는 선하고 진지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잊혀야 할 사람인 것 같아.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지난날에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면

    그곳에서 온전한 나로 있기가 잘 안 돼."


    에이, 선배. 그래도 저는 안 잊을 거예요. 그런 소리 마시고, 푹 쉬시고! 다 충전하시고! 그렇게 다시 가셔야 해요. 선배와 헤어진 후, 나는 그의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그의 말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깨달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정말, 깨달은 것이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거나 원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 때. 해야 할 대부분의 일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일 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만 나의 말은 무시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지만 나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때. 그런 때에 묵묵히 참아낸다면. 그런 일들을 묵묵히 지나온다면.


    나는 적어도 그 선배의 선하고 진지한 눈만은 닮을 수 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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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부끄럽냐면...  집착했던 거. 는 내가 사람들한테 잊히는 건 여태까지 열심히 쌓아온 일들이 와르르 무너지거나 혹은 내 존재 자체가 무시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계속 노여워하고 무서워했던 지. 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나간 사람들이나 일에 집착하는 건 오늘을 놓치는 일이겠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잊히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대신에 지난 날들에 비해 하찮아 보이는 날이더도, 오늘을 좀 더 사랑하려고."


ⓒTom Vanderheyde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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