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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y 25. 2020

바다가 아쉬워서

    운전을 하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바다가 보이면 곧바로 차를 세우고 옷을 벗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맞이하는 뜨거운 볕에 온 몸이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무심한 척 트렁크에서 몸통만 한 바디보드 꺼내 옆구리에 끼고 슬리퍼를 끌며 바다로 걸어갔다. 물에만 들어가면 더위도, 뜨거운 볕도, 아니 세상 모든 게 괜찮아질 걸 알았다. 아, 그렇다고 수영을 잘하거나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나에게 바디보드는 구명조끼 같은 것이었다.


    그 바다엔 우리 말고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구명조끼는 물론 수경도 없이 바다 깊은 데로 잠수를 했다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이들을 모래사장 위에 서서 바라보았다.


    "여기 사람들은 진짜 좋겠다."

    "매일 수영해서?"

    "응. 매일 바다에 올 수 있어서."


    우리는 천천히 발목을 적시고, 그다음엔 팔을, 그다음엔 가슴팍에다 바닷물을 끼얹었다. 물은 미지근했다. 이번엔 과감하게 물로, 물이 허리께에 올 때까지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그제야 보드를 배에 대고 올라 발장구를 친다. 속수무책으로 행복해진다.


    보드에서 내려 발을 땅에 대보려고 했지만 발이 닿지 않았다. 그럴 땐 수경을 쓰고 을 참으며  바다에 얼굴을 처박는다. 엉덩이만 물 위로 내민 채로 앙증맞은 물고기들과 산호들을 구경하다가 다시 푸하- 하고 고개를 들보드 위에 눕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얕은 물로 나와 잠깐 쉬어야지.


   한 여자아이가 내 옆에 와 앉는다. 곱실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맑은 두 눈, 납작한 코, 새까만 피부 그리고 동그랗게 튀어나온 배. 아이는 바닷물에 젖어 무거워진 담요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레베카요."

    "여기 살아?"

    "네, 저기 초등학교에 다녀요."

    "1학년?"

    "네."


    아이는 대뜸 수중 점프를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깊은 데로 이끌었다. 그렇게 아이는 몇 번이나 돌고 돌고 또 돌며 우리의 박수를 받았다.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라는 말에 몇 번이나 점프를 시도했지만 실패. 그 모습에 아이는 아이답게 웃어 보였다. 아이는 이번엔 내가 물 위에 집을 지어줄게요, 라며 젖은 담요에 공기를 담아 물속에 펼쳐냈다. 이야, 너 대단하다. 이번엔 우리가 아이답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있는데, 저 멀리 나무 사이에서 한 남자가 아이를 불렀다. 그 애 아빠였다. 아이는 아빠한테 알아듣지 못할 말로 대답했는데(아마도 현지어였겠지?), 꼭 '아빠, 이제 갈게요. 잠깐만요!' 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서너 번, 아빠는 이제 집에 가자고 아이를 불렀지만 아이는 쉽게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뭍으로 다섯 걸음 걷고 다시 점프를 보여줬고, 또다시 다섯 걸음을 걷고 물장구를 쳤다. 아이는 갈 길을 쪼개어 걸으며 몇 번이고 바다를 내다보았다.


    "바닷가에 살아도 바다가 아쉽나 봐."

    "바다니까."


    해가 많이 기울었고, 바람이 선선해졌다. 이제 우리도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여행이 끝나려면 아직 하루가 더 남았지만, 이미 머릿속엔 밀린 보험료와 휴대전화 요금, 관리비, 해야 할 일들, 맡겨둔 강아지 생각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아까 걔도 내일 학교 가기 싫겠지?"

    "그럴 거야, 아마."


    바다 위의 구름들은 진주색으로, 그 밑에 하늘은 분홍색이었다가 조금씩 주황색으로 물들어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모래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가야 했다. 미리 사둔 고기나 구워 먹어야지, 생각하며 여행의 끝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2019, 괌, 미국


ⓒWade Lambert, unspal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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