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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Nov 09. 2020

우리는 그렇게 신을 만날 수 있겠지

신이 계시다면 너와 나 각자의 속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계실 거야.
신비한 마술이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고.






    나는 결국 또다시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말았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던가, 아마 열 번은 넘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롭고 설렌다. 좋다. 어느 정도냐면, 자막을 읽다가 주인공 셀린의 표정(핀볼이 잘 안 될 때 찡그리는 눈살 같은)이나 제시의 손짓(셀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것 같은)을 놓치게 될까 봐 대본을 출력해서 그들의 대사를 익혀두고, 플레이어도 없는데 DVD를 몇 개나 사다가 집안 곳곳에 고이 모셔둘 정도다. 그중 하나는 밥솥 옆에다 세워두었다. 밥 풀 때마다 본다.


    처음엔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매력적인 모습에 반해서 좋았고, 그다음엔 영화 속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철없는 기대감에 좋았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스무 살이었으니까.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비엔나가 좋았다.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비엔나에 간 것도, 그 도시를 오랫동안 여행한 것도 이 영화 때문이었다. 정말 나는 영화에 나왔던 초록색 철교 위에 섰을 때 감격했고, 그들이 입을 맞추던 관람차 안에서는 녹아났다. ALT&NEU라는 레코드샵에서도 오페라하우스가 건너 보이는 동상 앞에서도 많 두근댔다.


    요즘엔 주인공들의 훈훈한 외모나 불같은 사랑, 아름다운 비엔나의 모습보다는 두 사람이 쉬지 않고 얘기를 한다는 영화 콘셉이 좋다. 그들게 주어진 단 하루, 그 짧은 시간은 끊이지 않는 대화들로 빼곡히 차오른다. 그건 거의 기적 같은 일. 자기가 마치 '침대에 누워 자기의 일생을 회상하는 노파' 같다고 여기는 셀린과 '몸은 어른이나 정신은 여전히 열세 살 소년'처럼 느껴진다는 제시는, 분명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하여 자기를 부인하진 않는다. 사랑하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하고, 대립할 땐 과감하다. 서로 다름에도, 그럼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아,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카페 스펄 안에서, 그들이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


    중학교 때부터 2G 폰가지고 다녔었다. 물론 그땐 요금이 아주아주 앙증맞은 금액대라 마음껏 문자나 전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휴대전화는 나의 가장 가까운 물건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이나. 대학에 가고 귀엽고 조금 무용했던 2G 폰이 이름도 똑똑한 스마트폰으로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휴대전화는 내 몸에 더 찰싹 붙었다. 그건 굉장히 유용하지만, 또 굉장히 무례히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시간을 아껴주었지만, 그 시간들이 도대체 어디에 쌓여있는지는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좁혀주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간극이 생겨버렸다. 빠르게 정보를 가져다주었지만, 부정적인 추측과 절대적인 낙관 혹은 비판이 난무한다.


    1995년에 만든 오래된 영화를 여태껏 찾아보고 여전히 애틋해하는 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주인공들 사이를 선회하는 생기 때문이리라. 눈을 마주 보고, 갈등을 싸움이라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자기가 맞다고 우기거나 거드름 피우지 않는 대화. 그런 대화는 생기를 피워낸다. 나는 그게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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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건 애드리브가 아녔을까?, 하는 주인공의 스치는 말 한마디까지도 감독에 의해 밀하게 계산된 대본이었다는 사실은 '그 봐, 끊이지 않는 대화란 정말 기적이 맞다니까'라고 고집 피우게 만든다. 영화의 배경이 비엔나고 그들의 언어가 독일어가 아닌 영어라는 설정도, 서로에게 철저히 낯선 사람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끊임없이 나열되는 다양한 주제도... 그래, 영화는 영화다. 그러나 대화는 대화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화해야 한다. 갈등을 무서워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은 인정하면서.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면서.


    으로 우리는 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찾아간 카페 스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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