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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Nov 11. 2020

콩은 여깄는데, 번갯불은 어딨더라

    부장님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한낮이 되어서야 눈을 떴을 일이다. 어제 몇 시에 잠들었더라. 새벽 네 시였나, 다섯 시였나. 어쨌든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고 올 겨울부터 하게 될 편집일에 대해 통화를 했다. 지난 월요일, 표지 일러스트 작업을 맡아했던 출판사에서 간단한 편집 일도 해줄 수 있냐고 제안했었다. 재택근무, 맡은 일만 제 때 끝내주면 되는 일. (네네, 당연하지요. 제 꿈이 디지털 노마드족이 되는 거라고 말씀드렸었나요?) 인생은 대부분 생각지도 않던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 12:40 pm 집에서 출발

    통화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오전 열한 시. 오늘 뭘 하기로 했었지... 아, 맞다. 바다. 오늘 바다에 가기로 했었지. 그 생각이 나니 잠이 달아났다. 옆에 잠든 남편을 흔들어 깨우고, 대충 얼굴을 씻고, 바나나와 식빵 몇 장을 챙겨 들었다.



| 2:20 pm 서피비치 도착

    오늘은 늘 가던 고성 말고 양양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 서피비치라는 해변이 있는데, 거기가 그렇게 힙하다고. 하지만 내 눈에 그곳은 좀 어지러워 보였다. 여기저기 세워진 대나무 울타리, 핼러윈의 너저분한 흔적들, 지난여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쓰레기들.



| 2:50 pm 미리 알아둔 카페로 이동

    사실 겨울 바다는 할 게 별로 없다. 남편과 바다를 걷고, 몇몇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는 걸 구경하고. 그렇게 한가롭게 해변을 걷다가 날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다. "여보, 어떡해. 오늘 면접 6시까지래." 면접 공지를 잘못 본 남편의 얼굴이 녹는다. 그가 봐야 하는 면접은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비대면 면접, AI역량검사. 노트북이 있는 집까지는 넉넉히 두 시간이 걸리니 늦어도 세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아, 그래도 커피 한 잔은 괜찮지 않을까?



| 3:00 pm 아주 잠깐의 커피

    세 시에 여는 카페에 들어가 크림 커피를 한 잔 마심. 카페 강아지가 매우 예뻤음.



| 3:20 pm 카페에서 다시 집으로

    서울 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최대한 안전하고 빠르게 운전을 했다. 보조석에 앉아 면접 준비를 하는 남편을 보고, 우리 양양에 몇 시간 있었는지 아냐고 물었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한 시간." 그래, 한 시간. 그래도 다투지 않고 잘 왔다. 다툰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면접을 봐야 하는 남편 마음도 편하게 해줘야 할 것 같고.



| 4:55 pm 집 도착

    주차를 하기도 전에 남편을 집으로 먼저 보냈다. 주차를 하고 집에 들어가보니 그는 깔끔한 옷에 왁스로 머리까지 손질해놓고 있었다. 면접에 방해가 될까, 강아지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강아지와 산책하다가 지쳐 차에 들어가 앉았다. 면접이 잘 끝났으려나, 걱정도 되면서 갑자기 너무 피곤했다. "생강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 같다." 강아지는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콧바람을 피슝-하고 내뿜는다. 내일은 아침 일찍 서울에 가야 하는데, 잘할 수 있겠지. 인생까지 말할 것 없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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