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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너무 완벽했던 걸까

영화 [이끼] 리뷰

by 권씀

강우석 감독의 <이끼>가 원작(윤태호의 <이끼>)의 비교대상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견했던 일이다.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했는가, 얼마나 넘어섰는가,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는 납득할만한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영화가 원작이 이룬 성취와 인기를 이미 등에 업고 시작한 이상, 이런 분위기는 얼마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 편의 영화가 원작의 영향력, 원작의 첨부 없이 혼자 힘으로 서 있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다. <신과 함께>처럼 아예 별개의 이야기로 다룬다면 모를까. 소설이든 만화든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면 재창작을 할 때 방향성을 확실히 잡고 나가야 한다.

<이끼>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대체로 같은 자리를 맴돈다. 먼저 유해국이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궁금증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했다. 유목형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기도원의 집단 살해자는 누구인가? 그 다음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 그렇다면 유목형과 천용덕은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인간인가. 표면적으로 이 물음들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이 물음들을 중심으로 영화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영화가 스릴러로서 다소 허점이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혹은 인물들과 상황을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무언가의 상징으로 규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런 시도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강우석의 <이끼>를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이끼>를 보는 것에 가깝다. 이는 강우석 감독의 작품 중 <실미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던 문제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미도>는 대성공을 거둬서 다행이었지만.


우선 영화는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는 천용덕과 유목형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픈 상처를 입고 종교로 구원을 얻으려는 유목형과 악랄한 형사 천용덕을 보여준 뒤 현재로 시점이 옮겨진다. 유목형이 죽음에 이르자 아들인 유해국이 천용덕의 마을로 찾아오게 된다. 사실 이 부분부터 앞서 말한대로 원작과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데 결국 가장 큰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 된다. 원작에서는 천용덕이 유해국에게 직접 연락을 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아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유해국에게 부고를 알리는 사람은 이영지로 옮겨간다. 강우석 감독의 의도가 반전을 위한 인물 배치의 변화였였기에, 영화와 만화가 말하는 메세지를 판이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만화가 말하는 구원과 인간의 한계를 묘사한 부분을 희석시켜버렸다. 그리고 이 점이 원작을 좋아했던 팬들의 원성을 샀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또한 영화는 이미 원작을 본 사람들을 배려한 것인지 몇 가지 스토리의 중요한 연결 부위를 생략하며 진행되었다. 우선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과의 관계가 뜬금없다는 것이다. 원작을 전혀 접하지 않은 관객은 영화에 그들이 처음 나오면서 왜 그렇게 대화 할 수밖에 없는가에 계속 질문을 던져가며 봐야 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해결사를 맡은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인연이 되었으며 어떤 캐릭터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극 중에 내 던져진 느낌이다.

이 영화는 추리극이라기보다 스릴러물이다. 캐릭터를 읽어가며 사건에 몰입한다면 오히려 스릴러물로서는 실패한 영화다. 스릴러물은 캐릭터에 자아를 끼워 넣은 채 사건에 철저히 몰입이 되어야 관객의 만족도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 부 유목형과 이장 천용덕의 관계를 보여 준 것은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훗날에 일으키는 싸움을 극화하기 위한 전제로 보여진다. 그런데 유목형이 그의 아들 유해국으로 치환되어져야 하는 설명 또한 토막 내어져 관객은 허리가 없는 머리와 다리를 보는 영화가 돼 버렸다. 그 허리는 관객이 상상해야 하는데 그마저 모티프가 부족해 건더기 없이 국물만 떠 먹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스토리가 끊겨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건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은 베이스의 존재도 그렇지만 <실미도>를 통해 소위 대중들에게 먹히는 연출을 알기에 음향, 구도 등의 적절한 배치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냈던 거라 생각이 든다.


원작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윤태호 작가는 애초에 주인공 유해국의 모델로 박해일을 점찍어놓고 극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당시 댓글에도 <이끼>의 영화화에 기대 반, 우려 반인 댓글이 주르륵 달렸었는데, 박해일 캐스팅 소식에 기대를 많이 했고, 강우석 감독 연출이라는 소식에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뽑아냈지만, 원작에서 중요 포인트로 작용했던 몇몇 시퀀스들이 영화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건 아쉬움으로 남았다.

강우석 감독의 손을 거친 <이끼>는 원작 본연의 음습함과 축축함을 모두 잃었다. 이야기의 맨 앞에 배치된 기도원 시퀀스는 조금씩 드러나야 할 이장의 본성을 미리 알려주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없었고, 배우들의 열연과는 별개로 대사는 종종 말풍선을 그대로 읽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탁탁 튀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감독 특유의 개그가 여기서도 그대로 쓰여 진다는 사실이다. 원작에서 시종일관 진지하고 서늘했던 악당들이 <공공의 적>의 강철중스러운 개그들을 두어 마디씩 쏟아내는 순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던 위엄은 산산히 깨져 버렸다. 악역들의 무게감은 줄어들었고, 이야기의 하드보일드함은 증발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끼>는 분명히 훨씬 더 좋은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었지만 원작의 탄탄함과 배우들의 호연이 무색한 영상물이 되었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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