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머네요. 어느 만큼 남은 겁니까?"
"....."
"거 그정돈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요. 좀 쉬었다 갑시다."
사내는 말없이 끄덕이고 옆에 서있다.
"있잖아요. 난 참 열심히 살았어요. 뭐 다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 없겠지만 말예요. 뭐랄까. 살면서 후회해본 것도 별로 없달까. 미련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을 소비하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내 시간을 갉아먹는 느낌이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어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사실 그렇잖아요. 사람은 한 부분만 있지 않다는 거. 그래서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사람이고, 또 누군가에겐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 살면서 척을 지는게 무서웠어요. 주변 사람들이 등돌렸던 그 차가운 기억이 얼마나 오래 갔는지 몰라요. 그래서 마냥 좋은 사람이고 싶었어요. 마음 쓰고 이야기 들어주고 감정을 덜어주고. 그러다 보니 내 삶이 사라지더군요. 참 모순적이죠."
사내는 말없이 물을 건넨다.
"고맙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참 어려웠어요.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고 내 짐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게. 이게 그래요. 내어주는 버릇 하는 사람들은 받는 버릇을 쉽게 들이지 못한다는 거. 그래서 남에게 짐이 될 만한 것들은 꽁꽁 감추고, 남이 든 짐은 들어주려고 하죠. 바보같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나 편한 사람이 되더군요."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오네요. 난 비를 참 좋아해요. 빗소리 듣는 것도 비가 내릴 즈음에 흙냄새가 올라오는 것도. 바지 밑단이 젖는 것 쯤이야 뭐. 비가 오면 내 감정들을 쏟아내요. 눈물 흘리기도 하고 소리내 울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괜찮은 삶이었어요. 고단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달까."
곁에서 묵묵히 끄덕이던 사내가 말을 건넨다.
"고생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가시지요."
"그럽시다."
한편 이승에서는 삼베옷을 입은 이들이 상여에서 내린 관을 장지에 내리고 있다. 떠난 이를 추모하며 다들 어두운 낯으로 망자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고, 축관은 진도씻김굿 사설을 읊는다.
흙은 관 위로 점점 채워지고 장지를 찾은 이들은 한없이 흐느끼고 무너진다. 인부들의 삽질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봉분이 완성되고 그 옆에 세워지는 비석 하나. 「많은 분들 덕에 길고도 짧은 여행 잘 마치고 갑니다.」
그는 그렇게 이승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다른 공간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