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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시선

여름 벅수 앞에서

by 권씀

들판엔 여름이 들었고

나는 그늘 찾아 너를 만났다


벅수야

이마에 맺힌 송진처럼

넌 아직도 묵은 바람을 품고 서 있구나


논길 따라 벌레 울고

참외꽃이 마른 잎 끝에 매달릴 때

너는 그 자리에서

몇백 번이나 해를 넘겼을까


나는 오늘 내 이야기를

너한테 맡기러 왔다

담벼락 아래 숨긴 울음도

작은 소망 하나도 놓치지 말고 들어다오


사람들은 헛것처럼 여겨도

너는 알고 있지

장독대 아래 묻은 사연이며

골짜기마다 지난 숨결을


한 잔 따라줄게

막걸리 말고 내 속내

마시고 나면 눈 좀 깜빡여봐

그래야 나도 안심하지


벅수야

여름이 깊어간다


네 밑동에도 풀씨 하나 자랐더라

우리 둘이서 말은 적어도

오늘 하루는 잘 지냈다고 말해보자


*벅수 :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며 세운 토속 수호신상을 뜻한다.

*아래 사진은 통영 문화동 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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