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들지 않는 집은 빨래를 널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고래의 아가리 속 같은 집에서 노인은 마르지 않는 빨래를 널곤 했다. 밖은 쨍쨍하건만 노인의 집은 그와는 반대여서 항상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검은곰팡이가 천장에서 내려오고 바닥에서 올라오고, 노인이 항상 꾸부정하게 다니는 것은 필시 나이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기초수급대상이라는 동아줄을 건네준 건 주민센터의 복지 담당 직원이었다. 노인은 건네받은 신청서를 꼬깃꼬깃 접어들고, 돌을 얹은 유모차를 앞세우고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민원 창구 앞에서 번호표를 뽑아 들고 마침내 노인의 순서가 되었을 때, 동아줄을 내려준 직원은 없었고 격무에 시달려 말라버린 곶감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직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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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할머니, 여기에 성함을 쓰시고요. 거기 말고요. 태어난 연도랑 적으셔야죠. 자녀분들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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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에 말주변이 없었고, 그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지난날의 자신이었다. 자식을 낳았더라면 이 직원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까? 노인은 하릴없이 고개를 가로젓곤 주민센터를 나섰다. 그런 노인의 뒷모습을 관심 있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앞에 놓인 일거리가 사라진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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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조금은 나았을까. 아니다. 설령 자식을 낳았더라도 '튀기'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 노인은 양공주였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한강 이남에 살았던 노인은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팔다가 결국 자신의 몸도 거리로 내몰게 되었다. 그래도 백인을 상대하던 다른 여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어차피 몸을 내줄 것이라면 백인과 배를 맞추는 게 주변의 대우와 시선이 달랐다. 하지만 노인은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저 돈을 많이 주면 그걸로 괜찮은 일이었다.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었던 노인에게 자신의 몸은 생계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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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피임도 못했기에 중절 수술을 받는 양공주가 종종 있었다. 돈을 받아야 하룻밤을 함께 하겠노라던 그녀들은 아이를 가지고서는 돈을 들고 찾아오던 미군에게 반대로 부탁 아닌 애원을 했다. 돈은 안 받아도 되니 그저 미국에 데려다 달라고. 식모든 접시 닦는 일이든 뭐든 다 하겠노라고. 짧은 영어로 애원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무관심이었다. 그렇게 양공주들은 이방인의 차가운 시선에 마음을 베었다. 노인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자주 찾아오던 마이클이라는 하사가 있었는데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명이랑 잤는데 내 아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말을 했지만 노인에게 그의 말은 다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폭발하듯 내뱉는 말이라는 것만 알 뿐. 한참 동안 말을 쏟아내던 마이클이 노인의 손을 잡고 간 곳은 미국이 아니라 허름한 간이 천막이었다. 개울물이 흐르는 간이 천막에서 노인은 아이를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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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노인을 떠났고 또 다른 마이클들이 기지촌을 떠났다. 그렇게 미국이라는 아득한 희망의 불씨가 꺼진 후 양공주들은 노인이 되었다. 게 중에는 미국으로 아이 아빠를 찾겠노라며 떠난 이들도 있었고, 모은 돈으로 술집을 차린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러질 못했다. 젊은 날을 회상하는 일은 그들에게 아물지 못한 상처에 또 흠집을 내는 것과 같았다. 자식을 품에 안지도 못한 그들이었기에 기초수급대상 서류에 이름을 쓰는 일은 버거운 것이었다. 노인은 집으로 들어가며 생각을 했다. 동아줄이 참 가혹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