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 겨울 입구에 다다른 아침 무렵이면 학교 뒤편 창고에 가서 갈탄을 가져오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장갑이 없어 맨손으로 갈탄 포대자루를 잡아야 했던 내게 같이 당번을 맡은 친구는 선뜻 자기가 낀 장갑을 내주었다. 털실로 얼기설기 엮은 자그마한 장갑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교실 가운데 있는 갈탄 난로에 선생님이 불을 지피면 아이들은 저마다 가져온 스뎅 도시락을 꺼내 그 위에 얹곤 했는데, 당번을 하는 아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었다. 나름 합리적인 방식에 툴툴거리는 아이들은 없었고, 2교시 전에 난로 위 올려둔 스뎅 도시락은 3교시가 되면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내었다. 도시락통을 바꾸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라 선생님이 손수 목장갑을 끼고 바꿨는데, 제일 위 올려둔 도시락의 주인은 그제야 큰 목소리를 내었다. 서로 도시락 위치 눈치를 볼 때 여유로운 아이들이 있었다. 그 당시엔 제법 귀했던 보온 도시락. 자그마한 가방에 넣어둔 보온 도시락은 마치 귀한 보물처럼 여겨졌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머리가 굵어지면 반찬 뺏어먹는 재미로 학교에 오는 녀석들이 꽤나 있었지만, 겨우 8살 인생들에게는 아직 모두가 친구이고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자리 잡고 있어서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먹었다. 기껏해야 옆 짝꿍이랑 반찬 바꿔먹는 정도. 노란 계란물 입힌 분홍 소시지는 지금에서 보면 밀가루 반죽에 불과한 반찬이지만 그땐 그랬다. 그 반찬이 가진 위력은 계란 프라이를 얹은 도시락만큼이었으니까. 여기저기 우와 소리가 들리면 선생님의 빙긋 웃음도 섞여 활기가 돌았다.
요즘 애들은 오전반, 오후반을 알까. 머릿수가 많아 한 교실에서 수업이 어려운 때였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때지만 그땐 동네에 아이들 소리가 제법 들렸던 때라 학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오전, 오후의 개념이 자리잡지 못한 아이들은 오후에 가야 할 학교를 오전에 가서 비슷한 신세의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학교에서 놀곤 했다.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다 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은 어제오늘 반가움이 달라서 학교 친구와 동네 친구의 구분을 짓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만 보는 친구는 어쩐지 데면데면했지만 동네 친구를 학교에서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괜히 툭 건들어보기도 하고, 말을 걸다 말다 씩 웃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점점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학년이 두어 번 바뀔 즈음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탐구생활에 적는 00 국민학교가 00 초등학교로 바뀌고 체육복에 새겨진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아이들은 조금은 점잖아졌다. 학년이 바뀌고 머리가 굵어져서였을까. 아니면 학교 이름이 달라져서였을까. 둘 중 하나든 둘이든 큰 변화를 겪은 때임은 틀림없었다. 국민학교에서의 시간은 싸구려 크레파스로 그린 풍경화 같아서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운 구석이 많았다. 삐뚤빼뚤하지만 되려 정감이 가는 그런 그림. 국민학생에서 초등학생으로 바뀐 건 세련된 느낌이었지만 어쩐지 교복을 처음 입어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쩔 수 없이 어리숙한 티가 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오늘은 길을 걷다 낡은 난로를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그해 겨울 봤던 그 난로. 오랜 물건을 보면 자연스레 오랜 기억을 꺼내게 된다. 이렇게 나이가 먹는 걸까. 나이가 드는 걸까. 아님 하릴없이 회상을 하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