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라는 단어는 누가 먼저 말할 수 있는가

외도를 저지는 사람이 책임을 바꾸는 기술

by 권두팔

회사는 공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한 번 멈췄다.

나의 연락을 읽고 씹는 그여자를 만나러
여기까지 오는 게 맞는지,
이 문을 열 자격이 내게 있는지,
내가 지금 너무 감정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남편의 회사를 가는 택시안 유리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을 못 잔 빨간 눈,
자꾸만 마르는 입술,

떨리는 손,
괜히 바짝 올라간 어깨.
그래도 이미 내 삶의 가장 사적인 공간은 허락 없이 침범당한 뒤였다.

악몽같은 시간이였다. 하루가 24시간 1분 1초마다 바늘이 나를 찌르는 기분이였다.


회사출입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이혼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었다. 어떤 여자길래.... 어떤 여자일까....


K드라마의 시퀸스처럼 난 그 상상속의 얼굴이 흐린 여자의 얼굴을 정확히 명확히 하고 싶었다.

동생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 점심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그녀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당황하거나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단정한 얼굴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꺼냈다.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그 말은
화를 부르기보다
나를 멈추게 했다.
"예의"
그 단어가 내 귀 안에서 몇 번이나 맴돌았다.
예의는 누가 먼저 말할 수 있는 단어일까.
관계를 건너온 사람이, 타인의 시간을 가로지른 사람이,
나의 낮과 밤을 빼앗아 간 사람이 그 단어를 먼저 꺼낼 수 있을까.
나는 순간, 그녀를 노려보지도 못했다.
대신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살폈다.
혹시 내가 과한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선을 넘은 건 아닐까.
조금 더 조용히,
조금 더 점잖게,
조금 더 체면을 지키며 말했어야 했을까.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먼저 자기 검열이 올라왔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무너져도
먼저 나를 돌아봤다.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지,
내가 더 이해했어야 했는지.
그녀의 말은 그 오래된 습관을 정확히 건드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을 넘은 건 이 둘은....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이미 오래전에 넘어가 있었다.

서로가 배우자가 있고 약혼자가 있는 사이인걸 알고 있음에도...

회사사람들 몰래 따로 연락을 시작하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고,

애칭을 부르고,

직원들 몰래 회사에서 밀회를 하고,

와인잔이 부딪히던 밤,
호텔 문이 닫히던 순간,
둘만의 대화가 시작되던 그때.
그때 이미 이 여자만이 아니라 남편도 나에 대한 예의를 저버렸다.

예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에 가깝다.
상대가 모를 거라 믿고 조용히 넘어가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알고 있던 예의 즉 약속이였다.
그녀의 말은
나를 작게 움츠러 들게도 작게 만들 수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려는 말이였다.

뻔뻔함으로 자신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숨겼다.

모르겠다. 진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꼈을지 아닐지...


대면할때 나의 핸드폰 녹음기능과 스마트 워치의 녹음기능을 확인하던 그여자...


나는 알았다.

나는
회사까지 찾아온 사람이었지만, 관계를 찾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관계는 내가 찾을 수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찾고 싶어하는 관계는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여자는 죄책감도,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구나....


이 둘은 선을 넘었다. 나의 가정을 깨는 선을 넘었다.


예의는 언제부터 남의 가정을 깨는 사람이 먼저 꺼내는 단어가 되었을까?


그리고 뻔뻔한 너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알려줘야겠다.

그여자에게 카르마, 업보 이런 단어로 시간을 주는건... 너무 관대할거 같다.


그때 그 여자가 나에게 사과만 먼저 했더라면,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외로웠다고 사실 진짜로 사랑했다고...죄송하다고 헤어져 달라고 아니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반성하는 척이라고 했더라면....

난 이정도로 분노하진 않았을 것이다.

너의 태도가 지금의 상황을 만든것이다.

자업자득이다.


그 여자를 만나고 회사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유리문에 비친 나를 다시 봤다.

입술을 깨물었고, 눈에 힘이 들어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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