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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3

by 호치담

"제가 아는 동생이 편지를 좀 전해달라고 해서요."


머리에서 혈액이 다 빠져서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자료실로 찾아온 그는 나를 성추행 했던 사람과 성추행 당하던 당시 함께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아는 동생과 편지 모두 반갑지 않았다. 차라리 보지 않고 파쇄를 할까도 싶었지만 그럼 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혹시 신변을 위협한다거나 또는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거나 어느 한쪽이든 내가 놓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편지의 내용은 전문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나는 취직도 하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충동을 참지 못하는 정신병력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그 치료를 위해 먹는 약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죽고 싶지만 울며 기도하며 버텨내고 있다. 나는 벌금형을 받거나 실형이 나오면 내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고를 당했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형량이 나오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경찰조사에서는 순한 양처럼 한 번의 반박도 없이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고 하던 그는 내게는 자기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신분은 노출되어 있고, 아는 형을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는 대범함이 또 놀라웠다.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은 이 편지의 내용을 모두 알고도 내게 건넨 걸까? 아니면 그저 불쌍한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마지못해 전달한 걸까? 어쨌거나 양쪽을 모두 알고도 편지를 건넨 그 사람이 또 하나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를 성추행한 사람은 일면식이 없는 이용자였다. 그러나 그와 동행했던 이용자는 10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용자였다. 사건 이후에도 그 사람은 도서관을 더 자주 찾았고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불안한 마음과 거북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공공도서관이니까, 나는 사서니까 누구에게나 동등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응대를 해야만 했는데 이런 편지를 전달받고 난 이후에는 그것이 더 힘들어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애써 눌러 참는 게 힘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뜸하게 찾았던 도서관을 사건 이후에 더 열심히 찾았다. 더 자주 보이고 그때마다 움츠러들었다. 동아리에서도 마주치고 두 시간을 함께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보았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등줄기가 축축했다. 또 어떤 날에는 내게 보란 듯이 큰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이모 아니 그 통장 깨지 말라니까. 아니야 괜찮을 거 같아."


마치 피해자가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리는 것처럼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통화를 했다. 나는 합의를 할 생각도 합의금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이 모든 일이 끝이 나기를 바랐다. 그 사람이 그저 자기가 한 일만큼 벌을 받고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정도의 그런 처벌이 있기를 바란 것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구공판이 열린다는 알림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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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차 사서이자 4살 짜리 딸과 43살 짜리 남편을 키우는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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