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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Dec 19. 2020

죽는 것보단 사표를 쓰자

스스로 세뇌하며 번아웃 탈출하기

코로나로 행사를 계획하고 멈추고 중단하기를 몇 번. 그렇게 미뤄진 행사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진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 몰아치듯 진행했다. 그 석 달간 1년의 호흡을 가진 2개의 공모사업을 모든 주말을 반납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쉴 새 없이 진행했고, 도서관에서 가장 큰 행사를 대면과 비대면으로 동시에 진행했다. 1년간 계획과 준비 상태에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다가 미뤄진 아카이브 사업은 결국 공모전을 진행하지 못하고 발간사업으로 전환하여 발간을 진행했다. 작년부터 신규사업으로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상자텃밭 사업과 독서리더 양성사업 두 개를 끝냈다.  


코로나 19로 도서관은 야간 연장도 진행하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나 홀로 남아 도서관을 밝히는 날이 많았다. 하루에 8시간 풀로 문화행사를 진행하면서 밥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뛰어다니던 날도 많았다. 정말 더 태울 것이 없이 다 타버리는 것 같았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스스로 일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저러는 거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그런 나에게 무엇이라도 도와줄 것이 없는지 도와주고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내고 고맙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일을 하루하루 해치우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집안일도 엉망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서는 게 제일 싫다던 남편은 매일 빈 집에 혼자 불을 켜고 들어가고 저녁도 군것질로 때우기 일쑤였고, 주말도 홀로 보내느라 인스턴트로 때우기도 했다. 시댁이건 친정이건 양가 집까지 챙길 여력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차라리 교통사고가 나서 그냥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누워서도 일 걱정만 할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다치거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면 일을 그만두면 되는데, 그만두더라도 중간에 그만두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든 12월을 향해서 하얗게 불태우며 더 태울 것이 없을 정도로 극까지 나를 몰아쳤다.


모두가 바쁘고 힘든 시기였겠지만, 나한테 주변을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만 힘들다'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시작하자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승진 순위명부가 도착했는데, 나는 승진 순위에 들지 못했다. 같은 직급에서 나이도 가장 어렸고, 가산점들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대학원도 가고 자격증도 따고 자기 커리어를 관리하는 시간에 나는 바보같이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너는 자격증도 안 따고 뭐했어."라는 팀장님의 질책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자격증을 딸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일하는데." 곁에서 관장님이 한마디 거드셨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관리 못하고 일만 하다가 승진에 밀리는 경우가 있다니까. 앞으로는 자격증도 따고 커리어 관리도 하세요." 솔직히 말하면 승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같은 직급에서 사십 대 중반인 분들도 많고, 당연히 경력도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같은 직급에서 막내인 내가 승진을 해봤자 가시방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자기 관리 못 한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마음이 참 힘들었다. 그 시점이 죽도록 일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잔혹했다.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하려고 발버둥 치느라 가정사도 다 내팽게친 이런 때.  이렇게까지 일을 해도 결국 평가는 숫자고 종이 몇 장 일 뿐이구나 하니 참 허탈했다. 다시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은 들어도, 일을 그만둬버릴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죽는 거 보다는 사표를 쓰는 게 낫다.' 스스로 세뇌하듯이 되뇌곤 했다. 어차피 일은 끝이 있고, 중간에 그만 둘 용기가 없으니 끝이 나고 생각하자 하고 버텨냈다. 그렇게 버티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2020년도 마무리가 되어간다. 사업은 종료되었고 정리와 결과보고만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매달리던 일들의 결과물도 나왔다. 총 3권의 책을 발간했고, 두 개의 사업의 설문조사가 마무리됐다.


결과물들을 차분히 보니 그 지옥 같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가 힘든 거 애쓴 거 다 알아주는 사람들이 여기 있었구나. 나로 인해 힘들었던 코로나 19의 터널을 지나오는 길에 위로가 되었다는 말들이 수도 없이 쓰여 있었다. 내가 진행한 문화행사들이 도서관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들이 쓰여 있었다. 고맙다고 감사한다고 남겨준 마음들이 지옥에서 나를 꺼내 주는 것 같았다. '맞아. 내가 언제 회사를 위해서 일했던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지.' 나의 사서로서 평가는 그 종이 몇 장의 성과평가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평가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이 마무리되고 아주 편안한 잠을 잤다. 꿈속에서도 내일 할 일을 되뇌면서 놓치지 말아야지 하면서 정신을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을 잤다. 그런 잠은 오랜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애쓰고 노력한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것이 결국 자초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했고, 그 마음 하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사서는 단순히 나를 밥 먹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게 해주는 그런 목적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서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경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게 적성에 맞아 13년째 사서로 사서 고생하며 살고 있었는데 내가 열심히 일한 것을 승진이나 성과로 보상받지 못한다고 억울하다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보상은 받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되돌아보고 나를 채워가며 소진되어 쓰러지지 않게, 그런데 물리적으로 일이 너무 많으니 나를 채워고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말 그대로 다 타고 재만 남은 상태로 그냥 이대로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계속했던 것 같다. 버릇처럼 움직이는 손과 발 그리고 쉬어지지 않는 머리는 계속 일 생각만 하면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울고 버티고 소리치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버텨냈다. 나는 사서는 정보를 서비스하는 일종의 서비스직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기분이나 감정의 상태가 일을 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게 싫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럴 때는 코로나 19로 마스크가 일상이 된 것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울감이 높아져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죽는 것보다는 사표를 쓰는 게 낫다.'라고 되뇌면 다시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분명 정상이 아닌 무너진 상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디에다가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너무 쉽게 돌아오는 대답도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였다. 그게 쉬운 사람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왔을까. 그게 쉽지 않으니까 이 지경까지 온 거였다. 결국은 혼자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상태였다. 다시 한번 다운 한계선을 정했다. '이것보다 무너지면 그때는 정말 사표를 쓰자.'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낮아지는 한계선을 재조정하면서 버텼다. 그렇게 한 해가 마무리되었다. 


일로 인해 오는 우울감은 끝이 있다. 버티면 끝이 오고 어떻게든 사업은 마무리된다. 그걸 버티지 못하면 사표라는 비상탈출구도 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나 아닌 누군가가 제시하는 방법은 아무리 최적의 방법이라도 반발심이 든다. '그만두라고? 내 일을 우습게 보는 거야?' '버티라고?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기는 하는 거야?'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일로 인한 우울감은 업무량을 다운시켜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거나 일로 인한 성과가 발생했을 때 낮아진다. 그 낮아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번아웃이라고 인지한 순간 벗어날 수 있는 탈출 버튼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나의 번아웃 탈출 버튼은 "죽는 것보다 사표를 쓰자."였다. 의외로 효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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