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엔 붕대가 좋더라!
온전히 내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발가락의 살이 옆 발가락에 의해 짓눌리는 느낌, 그렇게 걷다 보면 말캉거림이 느껴지는 순간, 괜찮던 발목이 굳어가는 느낌, 오금이 당겨지는 느낌,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발등의 통증 등 고통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온 산길. 무언가 잘못됨을 인지했지만, 이미 먼 길을 걸어와 돌아가기엔 늦었다 판단이 되었다.
차도에서 느낀 두려움과 불안함이 이번엔 더 크게 찾아왔다.
산길에는 그래도 차가 한 대 오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나있었다.
그 길을 따라 작은 산?을 하나 넘었다. 물에 잠긴 도로 덕에 신발도 흠뻑 수분보충을 할 수 있었고, 내 양말도 발목 뒤 흙탕물 덕에 리미티드 에디션이 되었다.
과연 앞으로 예정된 길은 어떤 길일까 지도를 보게 되었는데, 이런.. 앞으로의 길도 모두 차도와 산길로 이루어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자전거 도로를 찾아보았고, 북한강 자전거 도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 이제 이 길을 발견했을까?
왜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지 못했을까?
충동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문제를 겪게 만들어준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경험들이 짜릿하고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걸 인지한 순간에는 엄청난 후회와 현타가 나를 집어삼킨다.
그렇게 경로를 수정하니 약 6km 정도가 늘어났다. 예상보다 더 걷게 된 것!
그래도 차에 치일 수 있다는 불안함과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수정된 길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걸었다.
그렇게 다 닿은 자전거 도로는 편안했고 안전했다. 팔당댐 자전거 도로보다 더 많은 라이더들이 내 옆을 지나갔고, 큰 가방을 메고 걷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이는 없었다.
뒤돌아보니, 나는 수동적인 사람인 것 같다. 누군가가 말 걸어주고 응원해 주고 알아차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글을 적다 보니 또다시 나에 대해 알게 된다. 감사하다.
그렇게 양평 두물머리, 북한강 스타벅스, 다양한 수상 액티비티 센터들을 지나갔다.
도보여행을 하며 수많은 자전거 라이더들을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들 둘과 라이딩을 하는 어느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도 저 아버지처럼 소중한 아들들과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 소망? 이 생겼다.
그들을 보며 괜스레 부러워졌다. 아마도 아들이 부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꽤 아니 많이 가부장적이셨다. 말수가 적으셨고, 부모님 모두 일을 하셔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었다.
어렸을 적 함께 여행 간 기억은 손에 꼽는다. (물론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기억들을 천천히 더듬어보면, 언제 이 ‘따뜻함’이 느껴졌는지 아쉽게도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버지를 탓하거나 모욕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그런 책임감 없는 아버지도 아니시다.
그 시대와 상황, 형편에 의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에겐 그게 최선의 결과였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 누구보다 큰 책임감을 가지고 사셨던 분이시다.
토목, 건설 현장에서 관리자로 일하셨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배려심으로 그 누구보다 일에 진심으로 임하며 궂은일도 직접 나서서 하신 분이시다.
우리에게도 그러셨다.
다만 업의 특성상, 육체적인 피로는 그에게 가정을 쉴 곳으로 만들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나에게(딩크) 왜 이런 소망을 품게 하시는지, 믿지 않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물의 정원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팔뚝까지 시원한 물로 씻었다. 갤럭시핏까지 함께 씻으면 왜인지 모를 쾌감이 든다. 물이 닿으면 안 될 것 같은 기기에 물을 흠뻑 적신다니!
삼성이 허용한 쾌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저 멀리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20명 정도 되는 가족무리들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저는 @@에 거주하는 주민입니다." 이어서 관중의 소리도 들렸다. "이름을 말해라!"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끝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나는 한 번 뒤돌아본 뒤, 기분 좋게 길을 이어갔다.
이때부터 약간 지루해졌는지, 이어폰을 꼈고, 가장 편안한 순간에 듣는 '충무로 스타벅스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다.
이전에 힐링을 찾아 혼자 책을 들고 걷다 들어갔던 충무로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들었던 플레이리스트이다.
세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수많은 곡들이 '나를 들어주세요'라며 기다리고 있는 듯했고, 나도 그에 응답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그러다 물집이 나에게 못 버티겠다는 신호를 보내왔고, 나는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는 듯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붕대와 거즈, 반창고가 있었다. 난 이 물집을 만만히 보고서 반창고만 사서 나왔다.
편의점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으니 꽤 거칠어진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발가락은 물집이 터져 피부가 흐물흐물해진 모습이었고, 아직 물집이 고여있는 발가락들은 꽤 탱글 하게 부풀어있었다.
탱글한 물집 위에 반창고를 꼼꼼히 붙이고, 양말을 끝까지 당겨서 신은 다음 다시 길을 나서는 순간 발가락의 통증이 더 심해짐을 느꼈다.
머지않아 또 다른 편의점을 발견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들어갔다.
붕대가 있기만을 바라며 들어갔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아까 붕대를 보며 고민하던 나 자신을 탓했다.
화장솜을 만지작 거리며 ‘아, 이거로라도 해볼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점원이 보였고, 점원에게 혹시 몰라 붕대의 행방을 물었다.
점원은 ‘아, 붕대요?’하며 내가 뒤적거렸던 곳으로 향했고, 깊숙이 잘 안 보이는 곳에서 기어코 붕대를 찾아내었다.
1,800원을 주고 구매했다. 값싸게 느껴졌다.
야외의 긴 벤치에 앉아 붕대 박스를 뜯고, 챙겨 왔던 맥가이버 칼을 자랑스럽게 꺼냈다.
가져오길 잘했다!
발가락을 감쌀 만큼의 적당한 길이로 붕대를 잘라 모든 발가락들에 빈틈없이, 서로 부닥거림 없게 잘 감싸고 양말을 다시 한번 쭉 당겨 신었다. ‘제발 괜찮아라’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다시 일어섰다.
부드러운 붕대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걸을만했다.
붕대 쓰레기들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갑자기 귀여운 고양이가 보였다. 난 고양이, 강아지를 좋아한다. 물론 다른 동물도 좋아한다.
길냥이는 마치 도어맨처럼 편의점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마치 이 순간을 100% 만끽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옆에는 고양이 집이 있었고, 그 안에 한 마리가 더 들어가 있었다.
가방이 꽤 무거웠지만 주저 없이 쪼그려 앉고 도어맨 고양이에게 내 왼손을 내주었다.
천천히 다가오다가 기지개를 켜고는 기다렸다는 듯 배를 까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민 손을 더 가까이 뻗으니 내 손에 그녀의 머리가 작은 무게감으로 퉁 부딪혔고, 그렇게 한참 동안 머리를 만질 수 있었다.
나에게 아마도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순간을 선물해 준 고양이에게 참 고맙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고양이 친구, 잊지 않을 것이다.
아, 고양이들에게는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손을 내밀고 기다린 것!(뜨끔)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책임 없는 쾌락을 즐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머나먼 길을 나섰다.
그렇게 지루한 길을 계속 걷던 중, 마치 굳어버린 고무줄을 당기는 듯한 오금의 통증에 힘이 들어 근처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잠시 쉬기 위해 자전거 도로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오자마자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라는 식당을 발견해 마치 이끌린 듯 자연스레 식당에 들어갔다.
시각은 대략 10시 30분, 출발한 지 4시간 30분이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이른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갔으나, 생각보다 배가 안 고팠는지 맛있는 동치미 국물만 다 마시고 면은 절반을 남겼다.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참새가 식당 안에 들어와 창문에 부딪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인분께 말씀을 드렸다.
주인은 익숙한 듯 "아 또 들어왔네! 저 녀석 잡기 힘든데.."라고 하며 참새를 내쫓기 위해 카운터를 나섰다.
자전거 도로를 진입하려던 때, 가게 옆 작은 창문으로 참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역시 오늘도 그 녀석을 잘 내쫓으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