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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동규 Jan 31. 2023

세 사람

(3)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목수로 일한 지도 십오 년이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과거에 둘이 함께해야 할 수 있던 일이라도 무리 없이 혼자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의 노력과 좋은 품질의 가구를 알아보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단골이 된 손님들도 있었다. 사실 목공소의 단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오래된 음식점의 단골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 정작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그런 손님들이 있다는 걸 온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들도 스스로 일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인상만큼은 받고 있었음이다. 그러나 보다 더 적절한 순간은 없다는 듯이, 그들의 삶에 불행이 날아와 박혔다. 어느 저녁에 마을 인근 야산에서 산불이 났고, 얼마 안 가 두 사람의 목공소가 전소(全燒)하였다. 꼬박 하루 만에 진화된 불에 대해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를 내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자연 발생한 것인지 사람이 낸 것인지, 사람이 냈다면 그것이 방화인지 실화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엔 소문만 무성하였다. 그건 지역 의원(議員)과 수도의 고위공직자들이 이재민을 만나고 위로하러 피해지역을 다녀갔다는 소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마(火魔)가 지나가고 두 사람은 다급한 마음으로 일터를 다시 찾았다. 사실 밖에서 저녁을 먹다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막 들었을 때만 해도 얼른 목공소로 달려가면 뭐라도 건져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하였던 둘이었다. 듣자 하니 불이 시작했다는 산이 목공소에서 좀 떨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방향도 모르고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불일지라도 사람의 달음박질로써는 당해낼 수가 없기 마련이다. 결국 두 사람은 대피하는 사람들, 불을 끄러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방관들 사이에 어중간하게 섞인 채 목공소가 있는 방향에서 자욱하게 올라오는 짙은 회색 연기를 먼발치에서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불은 목재소에서 사둔 원목, 가구의 도안, 작업 장비 등을 전부 새까맣게 태워놓았다.     


믿기 힘든 광경에 한 사람, 즉 목수로서 일하는 데 보다 큰 자부심과 사명감을 지녔던 사람은 말 그대로 실의(失意)에 빠지고 말았다. 본래 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제까지만 해도,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어쩌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마 전만 해도 지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던 그는 이제 ‘정녕 신이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둘 리 없다,’며 잿더미 위에서 흐느끼며 울었다. 눈물과 함께 신앙심이 마르고 나서 그는 기도하였다. ‘오늘 제 희망은 완전히 꺾였습니다. 지난 십여 년의 고생 끝에 이제 막 이뤄가는 작은 희망까지도 사그라들도록 두시고서, 저를 통해 어떤 선(善)이라도 이루려 하신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앞으로는 살면서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이라도 주를 위하여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은 자칫하면 죽을 뻔한 것을 살았다며 생전 해본 적 없는 감사 기도를 올렸다. 본래 그는 종교나 신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에 옆에서 기도를 드리는 친구를 볼 때마다 본인들이 열심히 노력해 일이 잘되는 걸 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에게 감사해하고 영광을 돌린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던 그에게는 오히려 어제와 오늘의 이 일이 신앙의 계기가 될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접어두었던 자신의 오랜 바람, 바다로 나가 항해하고자 했던 자신의 소망이 살아남을 느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그간 바다에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이윽고 그는 좌절해있는 친구를 위로하려 말했다.

“이봐,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게 아니면 그만 일어나세. 나나 자네나 둘 다 살아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목숨만 붙어 있으면 괜찮다 이건가? 주위를 좀 보게. 그 큰불이 났는데 이렇게 피해를 본 건 온 마을에 우리뿐일세. 지금 우리가 피해를 본 만큼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네. 나는 나와 하나님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세. 오래도록 주일(主日)을 지키며 그 많은 헌금을 하고 말씀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돕고, 심지어 나보다 부유한 이라도 돕고 살았거늘, 그간의 나랑 자네 행실을 아시거든 우리부터 위기에서 건져주시진 않을지언정 외려 이렇게 우리만 불길에 우리 소유와 일터를 잃도록 방치하실 수는 없는 게 아니냔 말이네.”     


확실히, 마을의 다른 사람들의 집이나 소유는 간밤에 했던 걱정에 비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다 할 만큼 멀쩡했다. 또 두 사람이 일이 형통(亨通)할 때나 아닐 때나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덕에 마을 안팎으로 가난에 놓인 사람들이 두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두 사람은 이를 두고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몇 번 다투기도 했으나 매해 성탄절이면 곧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갈 마을 아이들 모두에게 직접 만든 작은 책걸상을 선물로 주었다.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에게만 만들어 줄까 하였으나, 이내 아이들 사이에도 일찍이 구분(區分)이 있고 차별(差別)이 있으며 또 소외(疏外)가 있음을 깨닫고 구별(區別) 없이 마을 내 모든 가정을 대상으로 정하였다. 그렇다 보니 두 사람은 연말을 삼 주 정도 앞두고서는 급하거나 중요한 의뢰가 아니면 일을 받지 않았으며, 또 이때 만들어진 선물용 책상과 의자는 누구의 눈에나 비싼 값을 매겨도 아깝지 않을 것들이었다.

“흠, 자네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다 이거지? 하지만 말이야, 신을 믿은 적 없던 나라도 알 법한 몇 가지를 자네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네. 분명 우리가 살면서 선행(善行)하려 노력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네나 내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는 없어. 계신다고 한다면 사실 그분의 선(善)과 공의(公義) 앞에 뭐라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 왜, 교회에서는 구원(救援)도 거저 주신 것이라 가르치지 않던가?”

사실 이렇게 말하는 친구의 속도 심히 쓰라린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행이란 것도, 착하게 산다는 것도, 범사에 열심인 것도, 오늘 같은 날에 불평하기 위해서 하면 신께서 그걸 알아주시겠는가?”

“그건 아니겠지···”

“그래, 또 자네처럼 독실(篤實)한 신자(信者)라도 오늘처럼 힘겹고 눈물 나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한다는 게 내게는 오히려 신께서 존재하신다는 방증(傍證)처럼 느껴진다네. 하나님을 믿고 착하게 사는 사람마다 만사형통에 무병장수하고, 믿지 않는 자나 행실이 악한 자면 모두 하는 일마다 결실이 없고 아프다가 박명(薄命)할 것 같으면, 사람에게 떠드는 입이 있고 보는 눈이 있으며 듣는 귀가 있거늘 누가 안 믿는다고 하겠나? 땅 위의 누군들 착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나? 그런 척이라도 하지 않겠어? 근데 세상이 그럴 것 같으면 우리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주어져도 아무런 의미도, 필요도 없지. 심지어 존재의 의미도 없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존재하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우릴 존재케 하고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이 스스로가 이 모든 걸 헛되게 할 게 아니라면, 그런 분이 만들고 주관하는 세상으로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문제 많고 모순투성이 같은 이 세상이 오히려 희망적(希望的)이고 완전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정말 하나님을 믿거든 이제 원망과 불평일랑 그만두고 일어나게.”     


친구의 설득 끝에 좌절해있던 사람은 마음을 바꿔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흡사 본인이 신실한 교인(敎人)인 양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던 친구의 노력에 감동하였을 뿐이요,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원망하는 마음도 별로 누그러지지 못하여, 그는 속으로 훗날 죽어서라도 하나님께 이번 산불이 도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꼭 따지리라 다짐하였다. 또 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이 괴로웠던 그는 일을 새로 시작하더라도 마을을 떠나서 해야겠다며 친구에게 말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십수 년 자리를 지켜온 마을을 떠나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이는 그간 둘이 모은 돈만으로는 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감사하게도 각지에서 보내온 성금과 물품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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