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낙인과 후회

나쁜 남자의 가면을 썼던 시간들. '바람'이라는 과오가 남긴 흉터

메타인지의 부재, 그리고 굳어버린 머리카락


아들아, 고등학교라는 긴 터널을 지나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빠는 그야말로 ‘쇼생크 탈출’ 포스터 같이 정말 큰 자유를 맛보았단다. 하지만 자유만 얻었을 뿐 내면은 여전히 남자 고등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찌질이’의 극치였지. 당시 아빠는 남고(男高)에서 보낸 3년 동안 여성을 대하는 법이나 자신을 가꾸는 법에 대해 그릇된 정보만 가득 채워온 상태였어.


그때 아빠의 스타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헛웃음이 난단다. 요즘은 자연스러운 왁스를 쓰지만 당시엔 머리에 ‘젤’을 바르는 게 유행이었어. 아빠는 적당한 양 조절을 할 줄 몰라서 늘 듬뿍 짜서 머리에 얹었지. 바람이 불어도 단 한 가닥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떡이 진 머리. 거기에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어설픈 마초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다녔어. 지금은 아빠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때는 제법 많이 피우던 시절이라 온몸에서 매캐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을 거야.


한마디로 당시의 아빠는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단다. 나라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또 어떤 성격적 장점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강하고 거친 남자’라는 막연한 이미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지. 아들아,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너만의 스타일을 갖는 건 아주 좋은 일이야. 하지만 그 시작은 반드시 객관적인 자기 객관화에서 출발해야 한단다. 나를 알아야 나를 빛낼 방법도 찾을 수 있는 법이니까.


G.T.O를 꿈꿨던 바보 같은 스무 살


대학 교정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아빠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어. 당시 유행하던 만화인 'GTO'나 '반항하지마' 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거칠고 불량해 보이지만 사실은 비범한 능력을 갖춘 그런 ‘고독한 늑대’ 같은 이미지를 선망했지. “나는 비록 불량해 보이지만, 그래도 실력으로 대학교에 왔다”라는 말도 안 되는 자부심을 풍기고 싶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한심하구나. 하하하. 현실의 아빠는 고독한 늑대가 아니라 그냥 동네를 떠도는 어리바리한 청년 중 한 명이었을 뿐인데 말이야. 게다가 아빠는 공대를 다녔기에 과에 여자가 거의 없었어. 우리 학번 전체에 여학생이 딱 다섯 명뿐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머지는 아빠의 ‘불량한 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 아마 그 친구들에게 아빠는 매력적인 이성이 아니라 그저 ‘머리 떡진 신기한 아이’ 정도로 보였을 거야.


오리엔테이션(OT)에 가서도 아빠의 그릇된 자존심은 멈추지 않았어. 술로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객기 하나로 소주를 물처럼 들이켰지. 요즘은 상상도 못 할 풍경이지만 그때는 술을 무서운 줄 모르고 마시는 게 남자다움이라고 착각했었단다. 다행히 그런 무식한 모습이 선배들 눈에는 싹싹하고 시원해 보였는지 선배들과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 덕분에 수업보다는 선배들과 술 마시고 PC방에서 밤새 게임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지. 1학년은 무조건 노는 게 ‘국룰’이라 믿으며 교수님께 편지를 쓰면 학점을 준다는 낭설을 믿고 시험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했단다. 결과는 당연히 처참한 학점이었지. 자유의 달콤함에 취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치고 있었던 거야.


연합 동아리, 우물 밖 세상을 만나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허송세월로 보내던 아빠는 문득 위기감을 느꼈어. 이대로는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학년을 넘기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아빠는 학교 밖으로 시선을 돌려 ‘연합 동아리’에 가입했단다. 사람이 모이는 풀(Pool)이 넓어야 인연을 만날 확률도 늘어난다는 아주 단순하고 계산적인 이유였지. 다행히 마음 맞는 친구 한 명과 같이 가입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


그런데 이 동아리 활동이 뜻밖에도 아빠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단다. 처음엔 이성을 만나러 간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아빠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생부터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어. 그들과 대화하며 아빠는 내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좁은 우물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지. 그들은 단순히 술 마시고 노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꿈과 비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나누고 있었어.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빠의 사고방식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 외적인 부분에서도 ‘젤 바른 마초’ 스타일을 버리고 조금씩 단정해지려 노력했고 고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던 대화의 주제도 조금씩 건설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지. 현실적인 장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 우리가 만드는 기술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밤새워 토론하던 그 시간들이 아빠를 소년에서 남자로 조금씩 성장시켜 주었단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대화의 숲에서, 아빠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인생의 첫 번째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었어.


첫 연애가 시작 되었다.


정말 의외로 아빠의 첫 연애는 상대방의 고백으로 시작되었단다. 그 똑똑하고 멋진 친구가 왜 그때 아빠를 좋아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야. 하지만 아빠의 첫 연애는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어. 꿈과 비전에 대해선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지만 정작 ‘연애’라는 실제 관계에 들어서자 아빠의 머릿속은 만화와 성인물에서 배운 왜곡된 허상으로 가득 찼거든.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에게 정말 미안할 뿐이란다. 아빠는 연애를 한 사람과의 소중한 교감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나도 드디어 여자친구가 생겼다’라는 호기심과 정복욕으로 대했어. 상대를 배려하기보다 내 욕구와 감정을 우선시했고, 여자친구를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했지.


그때 그 친구와는 그 시절 수많은 ‘처음’을 함께했어. 첫 키스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것 처음으로 단둘이 밤을 보낸 것까지. 하지만 그런 소중한 순간들조차 아빠의 이기심 앞에서는 빛을 잃었단다. 아빠는 당시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아서 병역 특례나 창업 준비를 시작했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소홀히 하곤 했어.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느라 여자친구의 전화를 일부러 안 받기도 했고 술을 잔뜩 마시고는 밤늦게 일방적으로 찾아가 잠을 깨우기도 했지.


요즘 네가 TV에서 보는 ‘막장 남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때 아빠의 모습이었단다. 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던 시절. 왜 그렇게 못나게 행동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결국 병역 특례에 실패하고 군 입대 날짜가 다가오면서 아빠의 무책임한 태도에 지친 그 친구와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되었지. 아빠는 도망치듯 군대로 떠나버렸단다.


이상형을 만난 캠퍼스 커플(CC)의 행복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아빠는 원래 학번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학교에 다니게 되었어.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복학한 그곳에서 아빠의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지. 과에서 정말 인기가 많고 예뻤던 아빠의 이상형에 꼭 맞는 친구와 ‘CC’가 된 거야.


CC라는 건 참 묘한 마력이 있더구나. 전공 수업을 같이 듣고 교수님 뒷담화를 나누고 학생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온종일 붙어 지내다 보니 정이 무서울 정도로 깊게 쌓였어. 대화도 너무 잘 통했고 아빠는 그 친구와 함께라면 세상 무엇도 부러울 게 없었지. 그리고 아빠는 그때 그런 안락함이 너무 좋아서 따로 시간을 내서 일을 또 하기보단 이 친구와 함께 하고 싶어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공부만 했었단다. 그렇게 그 친구와 싸운 적도 거의 없이 행복한 1년을 보냈단다.


첫 번째 친구와는 미숙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연애였다면 이 친구와는 비로소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사랑’을 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새해 첫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빌고 단둘이 골목길을 산책하던 그 소소한 기억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단다. 물론 지금 네 엄마를 가장 사랑하지만 그 시절의 순수했던 아빠의 마음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어. 아빠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고 빛나게 만드는지 깨닫기 시작했단다.


도파민의 노예가 되어 저지른 ‘천추의 한’


하지만 비극은 행복이 절정에 달했던 그 이듬해에 찾아왔어. 아빠가 여자친구에게 지극정성으로 잘해준다는 소문이 과에 났던 모양이야. 그것이 다른 여학생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중 가장 화려한 외모를 가졌던 신입생 후배 한 명이 아빠에게 대시를 해왔단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그 후배가 ‘진로 상담’을 하고 싶다며 술 한잔을 청했을 때 아빠는 거절했어야 했어. 하지만 아빠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지. 그날 밤, 아빠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단다. 소중한 여자친구를 두고 ‘바람’을 피운 거야.


당시의 아빠는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했어. 1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의 소중함보다 새로운 사람의 냄새와 나를 동경하는 그 눈빛에 정신이 팔려버린 거지. 그 후배는 외모적으로 정말 객관적으로 예쁜 사람이라 아빠 외에도 많은 남자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남자를 리드하는 법을 알았어. 요즘 말로 흔히 플러팅이라고들 하더구나 그런 처음 겪는 일련의 행위 하나하나가 아빠의 뇌에서 도파민이 터지도록 만들었단다. 평온한 행복보다 강렬한 자극에 눈이 멀어버린 거야.


처음엔 그 비밀스러운 관계가 주는 긴장감도 짜릿했어. 옛날 그 찌질했던 남자였던 내가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들을 저울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비뚤어진 쾌감까지 느꼈지. 하지만 아빠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어. 금방 여자친구에게 들통이 났고 그 친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실망과 분노를 쏟아냈어. 그럼에도 그 친구는 아빠를 사랑했기에 다 잊어줄 테니 제발 돌아오라며 눈물로 애원했단다.


하지만 그때 아빠는 가장 비겁한 결정을 내렸어. 이미 들켜버린 관계니 어차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새로운 자극이 더 중요하다는 이기심에 눈을 감아버렸지. 아빠는 1년을 함께한 소중한 보물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며칠 만에 이별을 통보했단다.


흐느끼던 뒷모습, 그리고 무너진 삶


이별을 말하던 순간 그 건물을 빠져나오며 흘낏 본 그 친구의 뒷모습이 아직도 꿈에 나올 때가 있단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그 작고 초라한 뒷모습. 그 모습을 본 순간, 아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 그냥 이제 당당하게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과 예쁜 외모의 여자를 내 옆에 당당하게 끼고 다닐 수 있다는 희열만 느꼈지.


그런데 집에 돌아와 그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후회가 밀려왔단다. 아빠는 그 후 몇 년을 그 충격과 자책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내가 함부로 내팽개친 그 사람이 사실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음을 그 보석 같은 가치를 내 손으로 깨버렸음을 뼈저리게 느꼈지. 설상 가상으로 그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졌고 그걸 지켜보며 아빠는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속아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절규했단다.


결국 아빠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새로 만난 그 후배에게도 온전한 마음을 주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기고 떠나보냈어.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으며 아빠는 홀로 남겨졌지. 몇 년 동안 그 친구의 주위를 맴돌며 용서를 구했지만 아빠에게 실망한 그 감정과 아빠의 무책임했던 그 과거의 트라우마는 끝끝내 극복하지 못했단다.


너에게 전하는 당부


아들아, 아빠는 지금도 ‘바람’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를 친단다. 그건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자기 자신의 삶까지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가장 비겁한 선택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빠는 지금도 항상 스스로에게 되뇐단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나에게는 조금 익숙해진 모습일지 모르지만 내 옆의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만나고 싶은 이상형이자 간절한 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 아빠가 그 예전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아련함을 느끼듯이 아마 네 엄마와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지.


너는 누군가가 상상 속에서나 그리던 그 거대한 행복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렴. 자극은 짧고 고통은 길단다. 도파민이 주는 짜릿함은 찰나에 사라지지만 소중한 인연을 배신한 대가로 치러야 할 자책감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법이야.


아빠의 이 고백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는 지금 네 엄마와 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도 문득문득 그때의 과오가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온단다. 그 저릿함은 결코 경험해보길 추천하지 않는 감정이야. 부디 너는 네 곁에 있는 인연의 소중함을 일찍 깨닫고 상대를 온 마음으로 존중하며 그 가치를 지켜낼 줄 아는 현명하고 단단한 남자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 아빠가 이 부끄러운 과거를 너에게 꺼내놓은 단 하나의 이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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