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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권 Jan 22. 2019

The Innocent Man (2018)

넷플릭스를 매일 하루 종일 보는 사람이 꼽은 '너도 함 봐라' 시리즈 

1982년 12월 8일, Oklahoma Ada, USA, 미국 중서부, 오크라호마 아이다, 완전 시골

젊고 똑똑하고 자기 앞가림은 내가 하겠다며 일찍이 독립을 해서 열심히 사는 미국판 82년생 김지영 같은 여자가 있다.

Debbie Carter, 데비 카터.

그녀는 그날도 어김없이 밤늦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케첩에 찍어먹을 미니 해쉬브라운을 오픈에 세팅을 해놓고 있었다. 

"꽝쾅쾅"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데비는 문을 열고...

다음날 데비의 시신은 침실 바닥에 알몸으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목엔 전기장판 케이블이 감겨있었고 그녀의 질 안에는 케첩병이 꽂여 있었으며 등엔 사람 이름이, 가슴엔 '죽어'라는 단어가 휘갈겨 있었다.


1984년 4월 28일, Oklahoma Ada, USA, 미국 중서부, 오크라호마 아이다, 완전 시골

Denice Haraway, 드니스 해러웨이, 미국판 82년생 김지영 넘버 2

주유소 계산대에서 밤늦게 일하던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해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된다.

사건 당시 밤, 게임을 하기 위해 잔돈이 필요했던 일반인 남자 둘이 주유소에 잠시 들렸고

그중 하나가 계산대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바로 전 드니스와 납치범이 서로의 몸에 팔을 감고 나오는 것을 스쳐 지나가듯 보았고 계산대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드니스가 백인 남자에 의해 팔을 잡혀 주유소를 나와 그의 회색 트럭에 타며 납치될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고 지나가던 남자는 둘이 커플인 줄 알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녀는 어디로 납치되었고 누가 납치한 걸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과 약간 오버랩되지만 연쇄살인 갑 오브 갑 미국답게 더 사이코적이고 더 으스스한, 미국 시골을 배경으로 발생한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The Innocent Man, 무고한 자,

이미 제목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가 너무 예측 가능한데도 

인물의 인터뷰, 실제 취조 영상, 문서, 증거들을 영리하게 배치 편집, 6개의 에피소드들이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로 연출이 되어 그럴싸한 선로를 만들어내었고 그 위에 놓인 트램을 나도 모르게 올라타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중에 에피소트들을 씬별 촬영분 별 브레이크 다운을 해보니 감독이 얼마나 여우같이 연출을 해서 나를 속였는지 웃음이 '픽' 났는데

예를 들면, 6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씬 영상을 A-15, A- 8, A-3.., B-4, B-15.., C-7, C-15.., D-11, D-19 식으로 배치했다.

A=<이 네 백인 남자들이 범인이야 증오해라 관객들아> 의도 영상들

B=<글쎄 과연 이들이 범인일까, 이 수사관들, 검사 좀 이상해> 의도 영상들

C=<어머, 얘네들 범인 아녔네, 이미 수십 년 옥살이, 억울해> 의도 영상들

D=<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있어, 과연 사형제 필요할까, 이들도 가족이 있다> 의도 영상들


이렇게 연출하고자 하는 의도별 영상의 큰 카테고리, ABCD안에 인물별 인터뷰와 픽션 촬영별 영상들에 통으로 번호를 붙인다.

예를 들면, 

존 그리샴 인터뷰=15, 

데비 카터 살인 당일 재현 연출 장면=3, 

드니스 헤러웨이 납치 당일 재현 연출 장면=8, 

당시 사건 담당 판사 인터뷰=7

이렇게 번호별로 촬영을 쫘악 다 해놓고 아마도 감독은 그 많은 영상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자르고 다듬으며 편집실에서 밤낮으로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실상 얘기하고 싶은 건 이게 아녔을까

"봐, 너희들 에피소드 1 볼 때만 해도 이 네 남자를 찢어 죽일 살인마라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이 사람들이 멍청했을 순 있어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아닌데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시키다니 그러기엔 우리 법체계가 너무 허술한 것 같지 않아?"

실제 쇼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 두 개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살인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의 가족, 엉성한 수사 그리고 기소로 인해 피해자 가족들이 입는 이차적 피해, 가해자라 누명을 쓴 무고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감내했어야 하는 고통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감독이 팔고 싶었던 건 사형제 폐지였던 것 같다.

(바지를 사러 들어갔다가 신발도 같이 사게 됐다)


ok, let's talk

나는 우리 법체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인프라, 테크놀로지가 얼마큼 성숙했고

또 얼마큼 더 성숙해야지만 우리가 100%의 확신으로 개인에게 형벌과 사형을 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봤다.

100%의 확신, 그건 불가능하지 싶다. 

아무리 철저한 정보, 기술, 지능 등으로 보완해도 그래 봤자 우린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다.

사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일단 우리 인간에겐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와 힘이 없다고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형집행 자체가 인간이 감히 신의 영역의 선을 넘는 것이라고 하고

설상 가해자가 누군가를 죽였더라고 그에 대한 형벌을 굳이 살인으로 정부가 보복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반인권적이며 반헌법적이고 피해자 가족들에게도 가해자의 사형집행은 그들의 고통을 씻어내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량한 사람들, 데비와 드니스 같은 사람들을 수십 명씩 죽인 진짜 가해자는 신으로부터 타인을 죽인 천부인권을 받아 살해할 수 있었는가? 

신만이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짜 살인범들이 신이 그들에게 특별히 주지도 않는 힘으로 없애버린 타인의 삶과 그 가족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사형제가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씻고 그들의 피해를 상쇄할 만한 보상의 개념으로써의 기능을 전혀 못하며 그것을 증명하는 실제 피해자 가족들의 예를 나열하는 데에는 사형제는 피해자 가족의 아픔과는 상관없는 

사회적 조치라는 걸 말하고 싶다.

한 개인이 사회가 약속한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행동을 한 즉시, 그것은 더 이상 개인과 그의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법의 체계 안에서 사건이 수사-기소-처벌 시스템을 타게 되면 우리가 오랫동안 

다듬고 정제한 법의 잣대로 피고인을 어떠한 방법으로 처벌할지가 중요 고려대상이 된다. 

일단 범죄의 유무, 그리고 양형이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 되어지는 피고인이 교도소에서 얼마나 살게 될지보다 그 죄의 유무가 더 선제적이고 그 판단의 무게는 더 무겁다. 

이 '판단의 무게'에 대해서는 사형제를 반대를 하든 찬성을 하든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므로 우리 사회는 

모든 개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자신을 변호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죄에 대한 판단을 3번을 받아 볼 권리들을 모두에게 부여했다.

그런 '판단의 무게'에 상응할 만한 묵직한 권리를 모두 행사한 후 일련의 과정을 모두 거치고도 피고인이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판단되어진다면 사회가 합당한 선안에서 그에게 내릴 수 있는 작은 형벌부터 큰 형벌까지 

중에서 맨 끝에 사형이 있는 것이다. 

The Innocent Man에 나온 것처럼 실제 전 세계에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복역 중이고 그중엔 오판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오판으로 인해 멀쩡한 사람을 가두고 죽이기까지 한다니, 그와 그 가족들의 끔찍한 고통은 내 상상으론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모두가 가라앉을 정도다. 

역설적으로 그만큼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법의 선반에서 사형이라는 돌댕이를 꺼내 버리지 못하는 거다.

좀체 안 꺼내지만 한번 꺼내면 모두를 가라앉힐 정도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써 사회가 살인 범죄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효과를 낸다고 믿는다.

동시에 나는 오히려 우리 세상이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기에 사형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음에서 인간들은 더 발전할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시스템을 끊임없이 다듬어 왔다.

그런 끔찍한 짓을 만에 하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질문과 절차를 거치며 판단을 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이성과 합리로 만들어내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법체계가 한 개인에게 오판을 내리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하지 않기 위해 이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데비의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론은 천신만고 끝, 뒤집어진 재판 결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고 그가 땅에 묻힌 날은 데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 정확히 22년이 되는 날이었으며 데비와 론의 각각의 장례식날에는 여간 눈이 오지 않는 오크라호마에 눈이 내렸다.

이 눈이 내리지 않는 오크라호마, 아이다에는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1909년 4월 19일, Oklahoma Ada, USA, 미국 중서부, 오크라호마 아이다, 완전 시골

모두 다가 총을 차고 다니던 시절, 아이다는 언쟁중에 수틀리면 바로 총을 뽑아 사람을 쏴죽이는 그런 거친 동네였다.

거스 보빗이라는 목장 주인과 방목권을 두고 다투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앨런과 웨스트에게 눈엣가시 거스는 무척 거슬렸고 청부 살인업자 밀러를 고용해 거스를 살해한다.

당시, 아이다 법집행관들은 이 앨런, 웨스트, 밀러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그날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 셋을 감옥에서 꺼내 수십명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목을 메달아 헛간옆에 전시하였다.

이 일은 신문에 실려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퍼졌다.

자력 구제의 최후의 동시에 법과 질서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는데 공감한 아이다의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비석을 세우고 기념한다.


"As a memorial of the end of the old west and the struggle for law and order"

"옛 서부의 종말과 법질서의 투쟁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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