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섭
[0210] 기념일 by 임경섭
무엇도 기억할 게 없을 때
우리는 기념일을 기다렸다
가을이 가기 전에 흩날리던 눈을
우리는 첫눈이라 불렀지만
첫눈은 우리가 서 있는 거리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을
우리는 기념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우리가 죽고 없어졌을 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육개장을 떠먹는 날을 상상하며 우리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죽음을 상상한 그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우리는 기억되기보다는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진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기억하며 사라질 수 있다면
우리의 죽음을 기다리는 나날이
우리에겐 기념일이 될 수 있다고
기억할 게 없는 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때
기념일들은 켜켜이 쌓여
우리를 기념할지 모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