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너져도 연필을 들자

왼발로 쓰는 기적

by 권휘석

22살이었다. 전봇대 위에서 감전되었고, 양팔을 잃었다. 전기독에 감염돼 오른쪽 다리마저 절단했다. 남은 것은 왼쪽 다리 하나뿐이었다. 잠들기 전, 눈을 감은채 기도했다.


‘이대로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범식 교수는 지금 강단에 선다. 47세에 대학에 진학했고, 58세에 교수가 되었다. 누구보다 늦은 시작이었지만, 누구보다 묵직한 걸음걸음이었다.


그가 세상과 했던 정면돌파 방식은 글씨 연습이었다. 왼발로 연필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다. 처음엔 물론 힘들었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익숙한 글씨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손으로 쓰던 글씨체가 왼발로도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는 말했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입니다.”


그 말을 나는 참 오래도 붙들고 있었다. 비록 몸의 일부는 잃었지만, 마음 만은 굳건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졌지만, 그 안에서 그는 똑같은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 말은, ‘살고 싶다’는 마음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고 이후, 그는 자주 물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컴퓨터를 배웠다. 직장을 다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경쟁은 냉정했고, 그는 또다시 고민했다. 결국 그는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이범식 교수의 삶을 떠올리면 세 가지 문장이 남는다.


고민이 길어지면, 길이 보인다.

기적은 기본기에서 시작된다.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살다 보면 갑작스레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다 떄려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날이 있다. 그럴 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작고 단단한 목소리를 기억하자. 아직 나는 살아 있고, 내가 적을 문장이 남아 있다면, 다시 한 줄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왼발로든, 왼손으로든, 혹은 마음으로든.


기적은 그렇게, 우리가 다시 연필을 들기로 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