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요령껏 살고 있습니다.
적당함에 대해 생각한다. 적당함.
'적당하다'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보면 (주로 ‘적당한’, ‘적당하게’ 꼴로 쓰여)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다, 라는 뜻으로 안내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너는 적당한 일상을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뭐 그렇다, 고 대답할 것 같다. 적당히 요령껏 잘 지내고 있다. 적당하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열정을 쏟고, 사랑을 다하던 일들이 무너진 날도 있었다. 흡사 아파트 5층에서 떨어진 것만 같은 고통이 이어지는 날도 있었다. 꿈과 사랑과 진심이 가득 찬 시절이 있었고,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져야 했던 날이 그랬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꿈이 이루어질 것 같았던 방송국 최종 면접에서 연거푸 떨어졌던 날이 그랬고, 함께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사람이 떠나던 날이 그랬다.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도 같은 고통이 반복되어 잠드는 것조차 무서웠고, 눈을 뜨면 감당할 현실이 고통스러워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길 바라던 날도 있었다. 그래, 그 날들에 비하면 지금 나는 참 적당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적당한 일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자기 전 이불속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사람 사는 모습을 손가락으로 휙휙, 적당히 서핑하면서였다. 친구들의 일상 사이로 인스타그램 맞춤 광고 알고리즘 역시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너 목공 관심 있을 거 같다? 이거 한 번 해봐!'라며 광고를 띄웠다. 그렇게 '더 알아보기'를 누르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지원 완료 버튼을 누르는 데까지 10분이나 걸렸으려나. 이불속에서 적당히 요령껏 고른 단어들이었지만, 나름 괜찮은 문장이 나온 것 같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바로 잠이 들었다. 훗, 아니나 다를까.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 조금 귀찮았지만, 뭐. 그 정도는 적당히 해 줄 수 있지. (나중에야 내가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난 붙을 줄 알았다. 그리고 설령 떨어진다 하더라도 내 일상에 큰 파장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진심으로 '적당한 일상'을 하고 싶다고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나는 많은 일을 진심으로 원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진심으로 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진심으로 원했는데 거절당하면 너무 아프니까. 아픈 건 정말 괴로우니까. 사람이든 일이든 많이 기대하지 않고, 기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진심을 주지 않으면 나도 다칠 일이 없을 테니까. 나에게 '적당함'이란 상처 받는 것이 두려운 나를 지키기 위한 일이다.
'적당한 일상' 목공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어쩐지 조금은 진심인 관계가 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을 때도, 나는 놀랐다. 왜냐면 내가 적당한 일상이 좋았던 이유는 반대로 여기서는 아무 말도 안 해도 됐기 때문이었는걸! 올해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끌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수많은 불확실성 가운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떤 희미한 무언가만 믿고 결정해야 하고, 그 희미함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키고, 부탁하는 말들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은 나도 불안하지만,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되니까 심호흡 한 번 하고는 괜찮은 척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 간 나도 소화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을 허공에 쏟아 내다가 목공 수업에만 오면 입을 닫고 묵묵히 손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그래서 목공 수업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순간은 누구보다 커다란 선반을 만들어 용달차까지 불러 한 짐 살림살이들을 바리바리 싣고 간 날이 아니라 첫날, 나무젓가락 하나를 만든다고 동일한 자세와 동일한 동작으로 세 시간 동안 대패질만 했던 시간이었다.(물론 안 쓰던 근육을 쓴 탓인지 그날 밤 밤새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진심이지? 우린 모두 처음 만난 사람들이고, 적당히 일주일에 한 번 볼뿐인데, 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왜 이렇게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어 하지?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을 텐데. 어느새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 내가 보였다. 어쩐지 나는 나의 나이 듦이 느껴졌다.
목공 수업이 끝나고 비대면 온라인 모임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러면서 나는 어쩌면 이 중에 제일 나이 든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 나이와는 상관없다.) 그리고 사실 조금 불편했다. 그 사람들이 불편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어떤 진심은, 어떤 용기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마 더 이상 진심을 꺼낼 용기가 없는 내가 불편한 것일 테다. 어떤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낙천적이고, 희망적이고, 도전적이고,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진심일 수 있던 아직 깨어지지 않은 어린 내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어느새 '적당함' 속으로 꽁꽁 숨은 늙어 버린 나도 잔상처럼 따라붙는다.
‘적당한 일상’은 끝났지만, 여전히 나는 적당히 살고 있기도 하고, 적당히 살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괜찮은 척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던 일상이 최근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끔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름 메타인지가 높은 편이라 이번에는 완벽주의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목공 수업에서는 적당히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었다가 망하더라도 그 못생긴 구멍은 나만 보면 되니까 적당히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에선 내 마음에만 들어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날이 많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어도, 엉망인 나를 남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은 늘, 너무나도 어렵다. 사실은 너무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지만, 그 마음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일조차 너무 지질하게 느껴져서 스스로에게조차 진심이 아닌 척, 적당히 하는 척을 하곤 한다.
물론 여전히 어떤 일들은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관계들 역시 적당해도 좋다. 하지만 어떤 관계가, 어떤 일이 서로에게 진짜의 의미가 되기 위해선 선을 넘어야만 할 때가 분명히 오기 마련이다. 선을 넘어봐야 선도 아는 거니까. 그 선을 넘어볼지, 그저 멀찍이 떨어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지는 결국 내 용기의 몫이다.
내가 아까 나는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고 했던가. 아니다. 실은 나도 외롭다고, 기대고 싶다고. 그리고 누군가 내게 기대해주면 좋겠다고. 이 마음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온전하고 용감하게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길 원한다. 그래서 요령껏, 적당히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엉망진창 그대로를 진심으로 살길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은, 지금 당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도 포용하려 한다. 아마 조금은 훨씬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적당한 일상을 보내려 왔다가 어쩐지 적당해지지 못하겠는 내가 있다.
본 글은 2020년 10월에 쓰고, 11월에 출간된 '적당한 일상'에 기고한 글입니다.
바보의 나눔에서 후원하고, 동네형들에서 운영한 <적당한 일상> 목공 활동에 참여하고 작성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