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리뷰
2017년, 어디선가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고 읽다가 아주 조금 남기고 중단했던 책입니다.
그 때 왜 읽다 말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다시 읽기 시작하니 어떻게 읽다 중단할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몰입해서 읽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전도유망한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던 주인공이 폐암 진단을 받고 22개월이라는 투병 기간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 쓴 작품이어서 글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회고록의 형태를 띤 작품이지만 한 권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자 심오한 철학 서적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죽음을 더 직접 탐구하기 위해 신경외과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저자의 이력은 작품 곳곳에 인용된 다양한 영문학 작품들의 구절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글도 잘 쓰고, 생각도 깊고, 의사로서의 실력도 출중한 데다 도덕심과 사명감도 투철하고, 아내와 딸에 대한 애정도 깊었던 다재다능하고 훌륭한 인재를 너무 빨리 죽음이 앗아갔다는 것이 애석하고, 투병 중에서도 이 책을 완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의 강한 의지와 실천력이 감탄스럽습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지만 "인간의 운명이 “제멋대로인 아이들 손에 맡겨진 파리” 같다"고 불평했다는 리어 왕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자처럼 삶을 사랑하고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던 사람에게 암과 죽음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을 마감하게 했다는 것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언제 죽을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점이 씁쓸하고 슬픔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 인간의 의지와 노력, 죽음이 다가올 때 어떤 태도로 맞이할 것인가, 나 또는 내 가족에게 저자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등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어서 아이에게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 책에서 나온 구절을 읽은 후 떠오른 생각과 감정은 초록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책은 잘 다듬어진 렌즈처럼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48쪽)
할머니에게 치명적인 뇌졸중이 찾아왔을 때, 눌랜드는 토머스 브라운 경의 ≪의사의 종교(Religio Medici)≫에서 본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는 엄청난 투쟁과 고통을 딛고 이 세상에 오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76쪽)
태어나는 순간도 정말 기적 같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기억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고통스러울지 평안할지 알 길이 없고 언제, 어떻게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알 길이 없으니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76쪽)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때로는 그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파가 일시 중단되며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인성’ 증후군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경험하기도 하는 졸도의 심각한 형태이다. (116쪽)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 한 번에 그릇을 통째로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120쪽)
누군가에게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 의사의 입장도 참 난처할 것 같고 (아무리 반복되는 일상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당사자가 느낄 충격이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상상만 해도 압도되는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설마 하며 부인하고 싶을 것 같고, 내가 단기간 내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漸近線)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142-143쪽)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161쪽)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중에서) (179-180쪽)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180쪽)
≪리어 왕≫의 글로스터는 인간의 운명이 “제멋대로인 아이들 손에 맡겨진 파리” 같다고 불평하지만, 실제 그 희곡의 극적 구조를 만들어주는 건 리어 왕의 허영심이다. (213쪽)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해도 인생의 가장 큰 사건들은, 특히 비극적인 사건들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일어나기에 이 말이 무척 공감되네요.
- 출처: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지음/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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