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이토록 사소한 것들』 리뷰
매일 반복되는 단조롭고 고단한 일상을 하루 하루 묵묵히 견뎌 나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된 작품입니다.
지금과 다른 시대, 다른 나라가 배경임에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동질감이 느껴졌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고 어떻게든 도우려고 하는 빌 펄롱의 따뜻한 심성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습니다.
『맡겨진 소녀』에서도, 이 작품에서도 마땅히 받아야 할 기본적인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 아이가 등장하고, 그 아이를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들은 친부모나 돌봄의 책임자 (수녀원의 수녀들)가 아니라 제 3자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맡겨진 소녀』의 '나'에게는 킨셀라 부부가, 이토록 소중한 것들의 세라에게는 빌 펄롱이, 빌 펄롱에게는 미시즈 윌슨이 그런 존재죠.
보통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족이나 친지에게 가장 먼저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고 가족이 최고다 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 속에서는 제 3자의 도움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큰 성장을 이루거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서로 돕는다는 것의 가치, 연민 또는 측은지심의 중요성이 잘 드러납니다.
세라를 수녀원의 학대로부터 구해낸 빌 펄롱이 느끼는 행복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도왔을 때 느낄 수 있는 귀한 감정이고, 타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과 관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빌 펄롱이 아내나 다른 이들의 조언처럼 세라의 불행을 그냥 모른 척했다면 세라가 그 혹독한 수녀원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가 베푼 친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확연히 느껴집니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과 사소해 보이는 관심과 친절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얼마나 위대한 힘을 지닌 존재인지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었고, 군더더기 없는 담백하고 잔잔한 문장이 가진 은은하면서도 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문장들도 많아서 좋았고요.
* 책에서 나온 구절을 읽은 후 떠오른 생각과 감정은 초록색으로 표시했습니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하루 하루 바쁘고 정신없게 살다 보면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시간이 주어진들 달라질 게 있을까. 오히려 머리만 더 복잡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이미 지나간 것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마음,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누구나 알면서도 늘 뒤돌아보며 되돌릴 수 있기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애들이 점점 크고 있어, 아일린.'"
"눈 몇 번 깜박할 사이에 결혼하고 떠나버릴걸."
"그런 거겠지."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커가는 걸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시간은 정말 누구에게나 정확하게 공평한 드문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야속하기도 하죠.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맞는 말인데, 이 작품 속에서는 무책임해 보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펄롱 같은 사람에게 다른 이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테고요.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삶의 대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되지 않나 싶습니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따라오는 선천적인 조건들 (부모의 관계, 부모의 능력, 국적, 성별, 건강, 외모, 지능 등)이 삶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고, 후천적인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렵거나 100%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부분들이 많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 편하겠지만 억울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휠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거리'에 대한 명언들이네요.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오히려 단점이 부각되어 보이고, 사람 사이에서도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죠.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어려움을 오히려 놓치거나 외면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소중함을 쉽게 잊기도 하죠.
야적장 정문에 도착했는데 자물쇠가 성에로 덮여 꿈쩍 않는 걸 보고는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침대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러나 펄롱은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길 건너 불 켜진 이웃집으로 갔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펄롱은 늘 그러듯 그냥 꾸역꾸역 할 일을 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아침에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은 제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라 공감되었고, 하기 싫고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꾸역꾸역'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한 부분들입니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윌슨이 말하곤 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언제나 예외도 있기는 합니다.
잘해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함부로 대하거나 쉽게 이용하기만 하는 비양심적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적절하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적절한 거리, 적절한 도움, 적절한 관심 등 적절한 정도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정말 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주고받음에 있어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다는 말은 'Give and take'의 태도를 연상시켜서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주는 만큼 받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거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서 자로 잰 듯 똑같은 양을 주고 똑같은 양을 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내게 도움을 준 바로 그 사람에게 똑같이 돌려주려고 하다 보면 주고받음 자체의 훈훈함이 옅어질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도움에 대해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도움을 베풀기도 하고, 내리 사랑이라는 말처럼 부모나 선배에게 받은 사랑을 자식이나 후배에게 베푸는 것으로 그 대상을 달리 하여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도 하며 조금 유연하게 서로서로 도움과 사랑을 돌아가며 주고받는 게 더 아름답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 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미시즈 윌슨이 펄롱에게 베푼 친절을 펄롱은 세라에게 베풀며 아주 큰 행복을 느낍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 도움, 사랑이 베푸는 이에게도 큰 기쁨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사람들 사이에 계속 돌고돌아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참 훈훈합니다.
"외국인들을 들이는 게 신경 쓰이지 않나 보네요."
"누구나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펄롱이 말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예수님에 빗대어 꼬집으니, 맞받아칠 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너무 크고, 그 안의 어떤 존재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너무 작은 존재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펄롱에게 뒤에서 작고 소박한 사랑밖에 줄 수 없었던 네드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 출처: 『이토록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저/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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